적진에서 2연승 질주…베테랑 임동섭·루키 강지훈 ‘신구 조화’ 빛나
안방서 무너진 전통의 강호 SK…‘사즉생’ 각오로 고양 원정길 올라
[잠실=권준영 기자] 봄 농구의 잔인한 계절, 누군가에게는 찬란한 축제의 서막이었으나 누군가에게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형벌의 시간이었다. 경기 종료 부저가 잠실벌을 가로지르자, 승자의 포효와 패자의 탄식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흩어졌다. 한때 리그를 호령하던 ‘전통의 강호’ 서울 SK는 안방에서 고개를 떨궜고, 거침없이 기세를 올린 ‘신흥 강자’ 고양 소노는 승리의 깃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14일 서울 송파구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린 2025~2026 프로농구 6강 플레이오프(PO·5전3승제) 2차전은 고양 소노의 80-72 승리로 막을 내렸다. 안방에서 치명적인 2연패를 당한 서울 SK는 이제 역대 6강 PO에서 단 한 차례도 허락되지 않았던 ‘리버스 스윕’(2연패 후 3연승)이라는 기적과도 같은 과제에 직면했다. 소노는 이날 승리로 4강 진출 확률 100%(25회 중 25회)를 완벽하게 선점한 반면, SK는 역사상 전례가 없는 ‘0%의 길’을 개척해야 하는 가혹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전반까지 33-46으로 뒤처지며 패색이 짙던 소노를 깨운 건 후반전 시작과 함께 가동된 ‘질식 수비’였다. 소노는 승부처였던 3쿼터에서 SK의 공격로를 철저히 차단하며 단 7점만을 허용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상대가 당황하며 자멸하는 사이, 소노는 이정현과 케빈 켐바오를 앞세워 무려 30점을 맹폭하며 단숨에 전세를 뒤집었다.
승리의 주연은 단연 ‘에이스’ 이정현이었다. 마침 이날 생일을 맞이한 이정현은 양 팀 최다인 22득점을 기록, 스스로에게 ‘승리’라는 가장 값진 선물을 안겼다. 여기에 19득점 5도움으로 힘을 보탠 켐바오,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준 임동섭(13점), 신예의 패기를 증명한 루키 강지훈(10점)까지 국내외 선수들이 완벽한 신구 조화를 이루며 승리를 합작했다.
반면 SK의 저력도 만만치 않았다. 4쿼터 에디 다니엘의 화력을 앞세워 65-67, 2점 차까지 턱밑 추격을 허용하며 경기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승리의 여신은 소노를 향해 웃었다. 종료 30초 전, 76-72로 소노가 아슬아슬하게 앞선 상황에서 다니엘의 치명적인 드리블 실책이 터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을 낚아챈 이정현은 전광석화 같은 패스를 건넸고, 이를 받은 켐바오가 승부에 쐐기를 박는 호쾌한 덩크슛을 꽂아 넣었다.
적진에서 2승을 선점하며 쾌조의 컨디션을 보인 소노는 16일 안방인 고양소노아레나로 자리를 옮겨 3차전을 치른다. ‘생일 자축포’를 쏘아 올린 이정현은 경기가 끝난 뒤 취재진과 만나 “안방에서 치르는 경기인 만큼 팬들의 뜨거운 응원 속에서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고 싶다”면서도, “3차전에서 끝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방심하지 않고 다시 1차전을 시작한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겠다”고 필승의 각오를 다졌다.
경기가 끝난 뒤 소노 손창환 감독은 안도와 자부심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손 감독은 미디어브리핑을 통해 전반전의 아쉬움부터 털어놨다. 그는 “전반에는 우려했던 대로 선수들이 다소 안일하게 경기에 임했다. 사전에 약속된 플레이가 나오지 않아 힘든 경기를 했다”고 냉정한 평가를 내놨다.
하지만 후반전 반등에 성공한 선수들을 향해서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후반 들어 선수들이 스스로 페이스를 되찾았다. 이를 보며 ‘우리 선수들이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싶어 대견하고 자랑스러웠다”고 소감을 전했다.
손 감독은 승부의 분수령이 됐던 전술적 판단과 심리적인 독려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전반에는 SK의 3점슛 성공률이 높았다. 결국 확률의 문제다. 우리가 할 일을 하면서 점수를 내주는 것과, 상대 페이스에 휘말려 끌려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선수들에게 ‘져도 괜찮으니 우리가 원래 하던 농구로 돌아가자’고 주문했는데, 선수들이 이를 잘 수행해줬다. 지도자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기복 없는 활약을 펼쳐준 베테랑 임동섭에 대한 칭찬을 빼놓지 않았다. 손 감독은 “임동섭이 정말 꾸준하게 해주고 있다. 과거 소속팀에서의 스타일을 버리고 현재 우리 팀의 농구를 완벽히 이해하려 노력한다”면서 “팀에 녹아들기 위한 그 엄청난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치하했다.
팀의 에이스 이정현에 대해서는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MVP는 역시 MVP다. 그 품격은 사라지지 않는다. 경기를 보며 나조차 감탄했다”며 환하게 웃어 보인 손 감독은 “승리만 생각하다 보니 오늘 너무 많이 뛰게 해 미안하고 걱정된다. 컨디션을 세심하게 살피겠다”고 말했다.
2연승을 거뒀음에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손 감독은 상대 팀 SK를 여전히 “선수 개개인의 능력치가 우리보다 우위에 있는 강팀”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그는 “SK는 결코 쉬운 팀이 아니다. 안영준의 출전 여부와 상관없이 워니는 4쿼터에 본래의 위력을 보여줬다. 3차전 역시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라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면서 “오늘 경기 중에도 방심한 순간이 있었고, 선수들도 이를 몸소 느꼈을 것이다. 3차전에서 끝내겠다는 조급함보다는, 철저한 준비를 통해 방심 없는 경기를 치르겠다”고 강조했다.
반면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SK 전희철 감독은 ‘사즉생 결의’를 다졌다. 정규리그 최종전에서 전략적 선택 의혹까지 감수하며, 만난 소노였기에 2연패의 충격은 더 컸다. 안영준의 부상 공백 속에 전반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3쿼터에만 30점을 헌납하며 무너진 것 역시 뼈아팠다.
먼저 전 감독은 패배의 아쉬움을 곱씹으면서도 선수들을 먼저 다독였다. 그는 “선수들은 준비한 플랜을 충분히 잘 수행해줬다. 전반까지는 흐름이 완벽했고 선수들의 움직임도 좋았다”고 평가했다. 다만 “3쿼터에 이상하리만큼 경기가 풀리지 않았는데, 결국 결정적인 순간 득점이 터져줘야 한다. 하지만 이기려는 의욕을 갖고 뛰어준 선수들에게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는 않다”며 패배의 책임을 선수들에게 돌리지 않았다.
역대 6강 PO 2연패 팀의 4강 진출 확률 ‘0%’라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도 전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2연패를 당해 가망이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기회가 남았다”며 “선수들에게도 아직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강조했다. 반드시 승부를 다시 이곳(잠실)으로 되돌려 놓겠다”고 사즉생의 결의를 다졌다.
적진인 고양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도 자신감이 묻어났다. 전 감독은 “오히려 1, 2차전을 통해 상대 팀의 분위기에 충분히 적응했기에 괜찮다. 홈에서도 소노 팬들의 응원 열기가 대단해 이미 예방주사를 맞은 격”이라며 “원정이라고 해서 특별히 위축될 것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끝으로 그는 “전반의 흐름이 좋았던 만큼, 부족했던 부분을 다시 면밀히 정리해 다음 경기에서는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하며 반드시 반격에 성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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