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전쟁 장기화로 에너지와 공업 제품 물가 지수가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이에 해외 주요 투자은행(IB)들도 한국의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일제 상향조정했다. 물가 공습 여파와 함께 외환시정 역시 높은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 지난달 외환 시장 거래량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중동사태로 인한 여파를 진정시키기 위해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국내 최대 원유수입국인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포함된 걸프 협력회의(GCC) 6개 회원국 주한 대사들을 만나 원유의 안정적인 수급을 당부했다.
◆에너지·공업제품 지수 역대 최고치...‘물가 공습’ 현실화
5일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3월 에너지물가지수(2020년=100)는 142.89를 기록해 2015년 1월 통계작성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에너지물가지수는 가정용 에너지 6종(전기료, 도시가스, 등유 등)과 차량용 에너지 3종(휘발유, 경유 등)의 물가지수를 가중평균해 산출한다. 지난달 경유(17.0%)와 등유(10.5%), 휘발유(8.0%) 가격이 치솟으면서 에너지물가지수가 큰 폭으로 뛰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상승폭이 5.2%에 달해 2023년 9월(6.0%)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에너지물가가 뛰자 유가의 영향을 크게 받는 공업제품의 소비자물가지수가 118.80을 기록하며 1985년 1월 통계작성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전년 대비 상승률은 2.7%로 2023년 10월(3.6%) 이후 가장 높았다. 공업제품의 상승세를 이끈 것은 석유류로, 9.9% 뛰었다. 내구재(109.60·2.0%)와 섬유제품(118.35·2.2%), 출판물(113.06·3.2%) 등도 1985년 1월 통계작성 이래 지수가 가장 높은 수준으로 올랐다.
유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국제항공료 물가상승률은 0.8%로 지난 1월(4.2%)과 2월(2.0%)에 비해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 이는 2월 말 중동사태가 터진 이후의 유가가 반영되지 않은 영향으로, 4월부터는 국제항공료 물가상승률이 치솟을 것으로 보인다. 항공권 유류할증료의 기준이 되는 싱가포르 항공유 평균값(MOPS)은 지난 2월16일∼3월15일 기준 전체 33단계 중 18단계로 올랐다. 전달(6단계) 대비 12단계 뛰어올라 유류할증료 체계가 도입된 2016년 이후 최대 폭으로 상승했다. 항공사들은 이달부터 판매하는 항공권의 유류할증료를 3배가량 올려서 받고 있다.
유가 상승의 여파가 전방위로 확산하면서 올해 한국의 물가상승률도 속속 상향 조정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0.9%포인트 올린 2.7%로 조정한 데 이어 해외 주요 IB들도 일제히 상향 조정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주요 IB 8곳이 제시한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는 지난 2월 말 평균 2.0%에서 3월 말 2.4%로 0.4%포인트 높아졌다. 뱅크오브아메리카(2.1%)와 UBS(2.0%)를 제외한 나머지 IB 6곳이 모두 전망치를 2.0% 중반대로 높였다. 바클리(1.9%→2.5)와 씨티(1.9%→2.6%), 골드만삭스(1.9%→2.4%), JP모건(1.7%→2.6%), HSBC(2.1%→2.3%), 노무라(2.1%→2.4%)가 일제히 상향 조정했다.
◆중동사태에 널뛰는 환율…외환 거래량 ‘역대 최대’
5일 연합인포맥스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현물환 거래량(서울외국환중개·한국자금중개 합산, 주간 거래 기준)은 일평균 139억1900만달러로 집계됐다. 외환 거래량은 2000년대 들어서 20여년간 하루 평균 60억∼90억달러에서 움직이다가 2023년에 105억9700만달러로 처음 100억달러를 넘었다. 이후 100억∼110억달러선을 유지했는데 지난달에는 140억달러(약 21조원)에 육박했다.
지난달 거래량 급증은 중동사태로 높아진 환율 변동성에 대한 대응으로 풀이된다. 환율이 출렁일 때는 환차익을 노린 거래와 환 리스크를 줄이려는 헤지 물량이 늘며 거래량이 증가한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난달 환율 일일 변동폭(주간 거래 기준·전 거래일 종가 대비)은 평균 11.4원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정책 전환 기대로 환율이 급락했던 2022년 11월(12.3원) 이후 3년4개월 만에 가장 크다.
지난 2월 말 1420원대까지 내려갔던 환율은 중동 전쟁 발발 이후 첫 거래일인 지난달 3일 26.4원 급등했고, 지난달 10일에는 전쟁이 곧 끝난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에 26.2원 급락했다. 지난달 19일 금융위기 이후 첫 1500원을 넘은 뒤에도 큰 변동폭은 이어졌다. 지난달 24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공격 유예를 말하자 22원 넘게 급락했다가 미국과 이란의 협상이 파열음을 내자 다시 급등해 지난달 31일 장중 1536.9원까지 치솟았다.
지난달엔 외환 당국도 환율 방어에 적극 나서면서 외환보유액이 전월보다 39억7000만달러 감소한 4236억6000만달러(약 641조원)로 집계됐다. 미국 상호 관세가 발표됐던 지난해 4월(-49억9000만달러) 이후 11개월 만에 가장 많이 줄어든 것이다.
한은 관계자는 “이란 전쟁에 따른 달러 강세로 기타 통화 외화 자산의 달러화 환산액이 줄어들었고, 국민연금과 외환 스와프 등 외환시장 안정화 조치도 함께 실행되면서 외환보유액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환율이 오르면 시장 안정화를 위해 외환 당국은 보유한 달러를 매도할 수 있다.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를 할 때 한은과 맺은 외환 스와프 계약을 통해 달러를 공급받는 과정에서도 외환보유액이 줄어들게 된다.
◆구윤철, 걸프 6개국에 “원유·LNG 공급 협조를”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3일 주한 아랍에미리트(UAE) 대사관저에서 GCC 6개국 주한 대사들과 만나 “한국에 대한 원유·액화천연가스(LNG) 등 에너지의 안정적인 공급과 나프타·요소 등 핵심 물품의 차질 없는 수급을 당부했다”고 5일 밝혔다.
구 부총리의 요청에 GCC 주한 대사들은 “한국이 최우선 순위”라며 “안정적 공급을 위해 한국 정부와 긴밀히 소통하겠다”고 강조했다.
GCC 6개국은 UAE, 사우디, 카타르, 쿠웨이트, 오만, 바레인 등이다. 사우디는 우리나라 최대 원유수입국이고, 카타르는 LNG 핵심수입국 중 하나다. 구 부총리는 이번 중동 상황으로 6개국 국민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위로의 뜻을 전하고, 평화와 안정이 회복돼야 한다는 데 지지 의사를 전했다.
이어 우리나라가 전체 원유의 약 70%를 중동 국가로부터 수입하고 이 중 95% 이상이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중동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우리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확대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양측은 “위기 상황일수록 ‘흔들림 없는 파트너십’이 중요하다”며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민간 비즈니스 협력은 강화돼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고 재경부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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