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 원형 훼손 없게 최소 개입
역사적 가치·의미 되살리는 일
디지털로 종이 완전 대체 어려워”
관객 1600만 돌파를 앞둔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열풍과 맞물려 ‘K기록물’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대표적이다. 수백 년 세월을 이겨 낸 기록물을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건 보존과 관리가 그만큼 잘돼 있어서다. 그 뒤엔 조은혜(44) 국가기록원 복원관리과 학예연구사처럼 종이 기록물을 복원하는 전문가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조 연구사는 지난달 25일 국가기록원 성남분원에서 가진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기록은 한 시대의 기억”이라며 “기록을 지키는 일은 결국 역사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는 용인대 문화유산학과 시간강사 등 도합 경력이 25년인 베테랑이다.
조 연구사는 “기록물 복원은 단순히 물리적 상태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되살리는 작업”이라며 “오래된 기록물을 마주하다 보면 ‘다음 세대까지 안전히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 자격이 있는 건 기록인으로서 기록의 역사적 의미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지론과 맞닿아 있다.
행정안전부 소속 기관인 국가기록원엔 종이 기록물만 약 687만철이 있다. 기록물 철마다 분량은 10매에서 1000매까지 천차만별이다. 훼손 상태를 점검하는 ‘상태 검사’를 거쳐 1∼3등급 중 3등급 판정을 받은 기록물은 중요도와 훼손도, 활용도를 기준으로 다시 심의해 ‘심화 복원’이나 훼손 방지를 위한 ‘예방 복원’, 전시 등에 신속히 활용하기 위한 ‘응급 복원’을 하게 된다. 조 연구사는 가장 난도가 높은 심화 복원을 담당한다. 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생산한 문서와 도면을 복원한다.
조 연구사만의 노하우는 기록물마다 가장 적합한 복원 방법을 찾는 것. 산성도·색도 측정기, 현미경 등 각종 장비가 동원된다.
“일반적인 종이 기록물은 산성화 정도, 찢김이나 결실(일부가 빠져 없어짐) 여부, 곰팡이·오염 상태 등을 면밀히 확인한 뒤 기록물 특성에 맞는 방법을 결정합니다. 모든 기록물에 동일한 방법을 적용할 수는 없어요. 같은 철의 기록물이라도 장별로 종이 재질이나 기록 재료의 특성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기록물 상태를 충분히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을 중시합니다. 기록물을 계속 보고 있으면 답이 나와요.”
복원엔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개월이 걸린다. 우선 복원 대상 기록물은 낱장으로 하나하나 해체한 뒤 건식 또는 습식 클리닝(세척)을 통해 오염을 제거한다. ‘건식 클리닝’은 부드러운 붓이나 지우개 파우더로 표면의 오염 물질, ‘습식 클리닝’은 종이 섬유 사이의 수용성 오염 물질을 없애는 방식이다.
이에 더해 습식 클리닝은 종이에 수분이 있는 점을 감안해 물속에 넣어 종이의 함수율(수분이 들어 있는 비율)을 증가시켜 유연성을 회복시킨다. 다만 기록 재료가 수성이 아닌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 뒤 종이 재질과 두께, 밀도 등을 고려해 보존성이 우수한 한지로 보강한다. 기록물과 유사한 색을 구현하기 위해 한지에 천연 염색을 한다. 조 연구사는 “천연 염색엔 보통 오리나무 열매와 도토리 껍질을 쓰는데 각각 노란빛, 붉은빛이 난다”며 “접착제도 한 반년에 걸쳐 밀가루에서 단백질을 걷어 내고 전분만 남긴 소맥 전분풀을 직접 만들어 쓴다”고 말했다.
조 연구사가 중시하는 또 하나의 원칙은 ‘최소한의 개입’이다. 그는 “기록물이 지닌 시간의 흔적과 역사적 맥락, 즉 원형을 훼손하지 않도록 신중히 접근하는 게 필요하다”며 “복원 목적은 기록물을 새것처럼 만드는 게 아니라 현 상태를 안정화해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 보존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조 연구사가 국가기록원에 몸담은 약 13년 동안 수많은 종이 기록물이 그의 황금손을 거쳐 갔다. 그는 “한 장 한 장 손으로 하는 업무 특성상 대부분 기록물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면서도 “그중에서도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인상 깊다”고 꼽았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엔 1895년 전봉준 등 217명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형사재판 판결문이 포함돼 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조 연구사가 2021년 복원 작업을 한 뒤 202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올해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9년 작성된 판결문인 ‘형사재판 원본’ 복원 작업을 하고 있다. 다섯 철, 1988매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그는 “대한제국 재판소가 폐지되고 통감부로 사법권이 이관되던 시기의 기록”이라며 “1910년 한일 병합 직전의 사법제도와 당시 사회 상황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기록물 복원 못지않게 보존·관리도 중요하다.
“복원 처리가 완료된 기록물은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중성 종이로 폴더와 보관 상자를 만들어 서고에 입고해요. 서고는 물론 작업하는 복원실도 온도 18~22도, 상대습도 45~55%를 유지합니다. 빛은 변색이나 탈색을 촉진할 수 있어 보관 시엔 자외선 차단 장치를 통해 빛 노출을 최소화하죠.”
기록물 보존을 위한 노력은 선조들의 지혜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조 연구사는 “조선왕조실록, 동의보감 등 문헌을 보면 당시에도 고문서나 서화를 보관할 때 빛과 습기를 피하고 충해를 방지하는 등 나름의 보존 방법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며 “이런 전통적인 보관 방식이 기록물 수명을 연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해충을 쫓는 천궁, 방균과 방향제 역할을 한 창포라는 약재와 함께 함에 보관됐다고 한다.
조선 시대 서화가 지금까지도 선명한 건 먹과 한지로 이뤄진 K기록물 특성도 한몫한다. 조 연구사는 “닥나무로 만든 한지는 섬유가 길고 질겨 내구성이 뛰어나며, 먹은 나무나 기름을 태워 얻은 탄소 성분이 기반이라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적”이라면서 “이런 특성 덕분에 시간이 지나도 종이의 색 변화가 비교적 적고 글자 역시 쉽게 휘발되거나 탈색되지 않는다”고 부연했다.
올해 7월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한국에서 처음 열린다. K기록물 보존 역량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국제 행사다. 조 연구사는 대표단을 상대로 국가기록원 부산분원에 보존 중인 조선왕조실록을 전통 방식으로 제책하는 시연을 할 예정이다.
그는 “전 세계의 중요한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보존·관리 방안을 논하는 자리”라며 “우리나라의 기록문화유산 보존·관리 역량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고, 국제 교류와 협력 측면에서도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연구사는 국가유산청 세계유산분과위원회 문화유산전문위원을 맡고 있기도 하다.
종이 기록물 생산이 줄고 디지털로 대체되는 데 대한 아쉬움은 없을까. 조 연구사는 “디지털은 기록의 접근성을 높이고, 원본 기록물은 역사성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잘라 말했다.
“기록의 디지털화는 기록에 대한 접근성과 활용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해요. 다만 종이 기록물이 지닌 물질적 가치와 역사성은 디지털 자료로 완전히 대체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종이의 재질과 제작 방식, 먹과 안료 등 기록 재료의 흔적, 기록이 만들어진 물리적 형태 자체도 중요한 역사적 정보이기 때문이죠. 디지털화는 기록을 널리 활용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지만, 원본 기록물 보존 역시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조 연구사의 목표는 “기록물 원본을 안전히 보존하며 디지털 기술과 조화를 이뤄 잘 활용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는 “기록을 남기고 지키는 일은 특정 기관이나 전문가만의 역할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라며 “기록의 가치와 보존의 중요성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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