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법대 시절 시위하다 제적
공장 취직 뒤 노동운동가 길 걸어
1994년 복학해 1997년 사시 통과
신림동 헌법 일타 강사로 명성
취미로 만든 술에 빠져 ‘예술’ 설립
숱한 시행착오 끝 ‘무작 53’ 탄생
“젊은 양조가 양성위해 정부 지원 절실”
비강으로 파고드는 은은한 곡물향. 참지 못하고 혀에 한 방울 떨어뜨리자 실크처럼 부드럽게 목젖을 타고 흐른다. 무려 53도이지만 알코올의 역한 기운 하나 없다. 여기에 입안을 꽉 채우는 감칠맛과 길게 이어지는 담백한 여운까지. 역시 장인의 솜씨는 다르구나. 지난해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콩쿠르 몽디알 드 브뤼셀(Concours Mondial De Bruxelles·CMB) 스피릿츠 셀렉션에서 한국 증류주 최초로 최고상 그랑골드를 받은 ‘무작 53’. 단 한 모금만 마셔도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은 정회철 농업회사법인 예술 대표의 눈물과 땀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한국 증류주 최초 CMB 그랑골드 수상
1994년 국제와인전문기자협회 회장을 역임한 루이 아보가 벨기에에서 창설한 CMB는 ‘와인 오스카’로 불릴 정도로 와인경진대회 중 규모가 가장 크다. 50여개국 심사위원 500여명이 출품 와인 1만5000여종을 블라인드 심사로 평가해 그랑골드, 골드, 실버 메달을 매긴다. 심사위원들은 전 세계에서 400여명에 불과한 ‘와인의 신’ 마스터오브와인, 마스터 소믈리에, 양조학자, 와인메이커, 와인전문기자 등 최고의 와인전문가들로 구성된다. 와인은 4개 셀렉션으로 로제, 레드·화이트, 스파클링 와인, 스위트·주정강화 대회가 4개 도시에서 따로 열리며 소비뇽블랑, 마슬란 등 품종별 대회도 따로 있다.
또 2006년 시작된 스피릿츠 셀렉션에는 위스키, 코냑, 브랜디, 럼, 보드카, 진, 피스코, 그라파, 바이주, 테킬라 등 전 세계의 다양한 증류주가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합한다. 한국의 증류주는 2024년 오미나라의 사과 증류주 ‘문경바람 오크 40%’가 처음으로 골드를 받으며 물꼬를 텄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난해에는 정 대표가 출품한 ‘무작 53’이 한국 증류주 최초로 그랑골드의 영예를 안으며 쌀과 누룩으로 빚는 우리나라 증류식 전통 소주의 맛을 세계에 알렸다. 지난해 멕시코에서 열린 27회 CMB 스피릿츠 셀렉션에는 전 세계 70개국에서 64개 카테고리 총 2598종이 출품됐고, 45개국 심사위원 140명이 블라인드로 심사했다. 최고상인 그랑골드를 받은 증류주는 57개로 전체의 약 2%에 불과하다.
강원 춘천시 김유정문학촌 인근에 자리 잡은 예술 양조장 입구에는 ‘그랑골드메달’이 또렷이 새겨진 금빛 CMB 로고가 당당하게 걸려 있다.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정 대표를 따라 숙성실로 들어서자 옹기에서 맛있게 술 익는 내음이 진동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정 대표는 어떻게 세계 스피릿츠 전문가들의 입맛을 홀렸을까.
“무작 53을 처음 만든 때가 2016년이니까 여기까지 오는 데 10년이 꼬박 걸렸네요. 무작은 전통 옹기에서 5년 이상 장기 숙성하는데 아주 미세하게 들락거리는 공기 접촉을 통해 계속 숙성되면서 향이 응축됩니다. 술잔에 따르면 공기와 만나는 과정에서 순식간에 향이 확 피어오를 정도예요. 위스키는 40도짜리도 먹기 힘들지만 무작은 53도임에도 아주 순하게 잘 넘어간답니다. 아마 피니시도 가장 오래가는 증류주 중 하나일 겁니다. 다음날까지도 잔에 향이 남아 있을 정도라니까요. 하하.”
정 대표가 CMB에서 큰 성과를 냈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다. 술을 처음 빚을 때 공장 누룩을 사다 만들었는데, 누룩 상태가 좋지 않았는지 술 항아리 10개를 버려야 했다. “그때 술은 누룩 맛이 좌우하고, 공장 누룩을 쓰면 술맛이 똑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직접 누룩을 띄우기 시작했죠. 5년 동안 실패를 거듭하는 씨름 끝에 저만의 누룩 맛을 완성했답니다.”
옹기 숙성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무작을 선보였지만 팔리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냥 옹기에 둬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3년 정도 넘어가니 술이 옹기 안에서 바뀌기 시작했고, 5년이 지나자 깊고 그윽한 색다른 향이 나왔다. “사실 옹기 숙성이 이런 효과를 낼지 전혀 몰랐어요. 술 빚는 많은 이들이 지금도 옹기에서 술이 어떻게 바뀌는지 잘 몰라요. 서양은 와인을 오크통에서 숙성하면 색과 향이 잘 나온다는 사실을 수백년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일제강점기 때 가양주 금지로 전통주 역사가 단절되면서 옹기 숙성의 장점과 효과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겁니다.”
◆노동운동가에서 헌법 일타 강사로
정 대표가 지금은 전통 소주로 장인의 반열에 올랐지만 사실 그는 헌법 전문가 출신으로, 그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을 걸어온 경우도 많지 않을 것 같다. 첫 시련은 고1 때 찾아왔다. 서울 미아리에 살던 시절 아버지 사업이 쫄딱 망했고 빚쟁이를 피해 트럭을 타고 야반도주한 뒤 신림동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숨어 살아야 했다. 이 때문인지 어린 시절부터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말 더듬는 증세가 더욱 악화했다.
“중식당에서 ‘짜장면’이란 말이 제대로 안 나와서 짬뽕을 시킨 적도 있을 정도로 심각했어요. 그때 저에게 위로를 준 것은 심리학이에요. 현대인의 고독과 자유를 깊이 있게 다룬 에리히 프롬의 심리학 저서들을 보면서 마음을 다스렸답니다.”
다행히 공부를 잘했던 그는 서울대 법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검사에게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조사를 받은 부친이 “한을 풀어 달라”고 요청해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법에는 관심이 없었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이라 수업보다 시위에 참여하는 날이 더 많았다. “언더서클에 가입해 철학, 역사, 경제, 교육 등을 닥치는 대로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사고의 범위를 넓혔어요. 수업은 뒷전이니 성적이 좋을 리 없었고, 졸업정원제가 있던 시절이라 결국 학점 미달로 2학년 1학기 때 제적당하고 말았답니다.”
캠퍼스를 떠난 그가 눈을 돌린 곳은 노동운동 현장. 군 복무기간 용접 2급 자격증을 땄고 제대 후 경기 안산 자동차 부품 공장에 취직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발을 들였다. 그러다 1987년 민주화 항쟁 때 공장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된 뒤 징역 3년, 집행유예 2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이후 평택노동상담소 소장을 끝으로 역량 부족을 느껴 노동운동을 접었다.
그런 그에게 운 좋게 기회가 찾아왔다. 1980년대 초에 제적당한 대학생들이 구제되면서 특례 재입학으로 1994년 캠퍼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노동운동 현장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조인숙 이사)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책임진 덕분에 1997년 사법시험에도 합격했다. 이후 그는 판·검사나 변호사가 아닌 신림동에서 ‘헌법 일타 강사’로 변신한다.
“사법시험 공부한 자료를 토대로 헌법 수험서를 썼는데 책이 꽤 팔리더군요. 연수원 다니면서 내용을 늘리고 종류도 다양하게 출판했죠. 연수원 성적은 좋았지만 노동운동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에선 떨어졌어요. 법무법인에 들어갔는데 잘 맞지 않아 하루 만에 때려치웠답니다.” 책 쓰고 남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던 정 대표는 이후 신림동 사법시험 학원에서 5년 동안 일하며 일타 강사로 이름을 날린다.
◆교수에서 전통주 양조가로 새 길을 걷다
정 대표는 2006년 충남대 법학전문대 교수로 강단에 섰는데 그때부터 건강이 악화했다. 강의를 잘하려는 욕심이 컸기 때문이다. 3시간 강의를 앞두고 있으면 미리 3시간을 그대로 연습했고, 새벽까지 책보고 연구하느라 하루 4시간만 자는 날들이 이어졌다. 이에 건강이 크게 나빠져 결국 1년6개월 만에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취미거리를 찾던 정 대표는 인터넷을 뒤적거리다 술 양조에 눈이 번쩍 띄었다.
“술 빚는 재료를 사서 독학했는데 술이 익을 때 작은 항아리에서 탄산이 뽀글뽀글 올라오는 소리가 아주 신기해요. 지인들에게 만든 술을 나눠 주자 맛있다고 감탄하더군요. 이에 자신감을 얻어 한국전통주연구소에서 정식 교육을 받고 강원 홍천에 양조장을 열었답니다.”
그는 2012년 5000평을 사들여 유럽의 와이너리처럼 술 빚고 체험하고 놀고 즐기는 체험관을 지었다. 사람들이 전통주를 잘 모르던 시절이라 단순히 술을 제조하고 파는 정도에 그치지 말고 술 문화를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이 컸다. 입소문이 나면서 단체로 방문객이 찾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2021년 춘천으로 둥지를 옮긴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춘천을 선택했어요. 김유정역이 바로 옆에 있어 서울에서 전철로 오갈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답니다. 또 김유정문학촌 근처라 전통주가 잘 어울렸죠. 더구나 양조장 터가 김유정 선생이 살던 시절 술을 빚어 손님에게 팔고 마을에도 공급하던 주막이자 술도가 자리이니 이처럼 운명적인 만남이 또 있을까요.”
정 대표는 현재 탁주 4종, 약주 3종, 소주 1종 등 모두 8종을 선보이고 있는데 앞으로 탁주와 약주를 줄이고 전통 소주를 강화할 계획이다. 알코올 도수를 낮추고 증류 방식도 바꿔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소주를 만들고 싶다. CMB 그랑골드 수상 이후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이지만 생산량이 적어 아직 수출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폭탄주를 마시는 음주문화가 바뀌려면 좋은 우리 술이 많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술이 맛있으면 기분 좋은 감정이 올라오고 속이 좀 거북스러운 술을 마시면 안 좋은 감정이 올라온답니다. 따라서 술 문화가 바뀌려면 좋은 술이 있어야 하죠. 희석식 소주 문화가 모든 음식문화를 자극적인 음식으로 바꿨어요. 하지만 좋은 술은 자극적인 음식과 안 어울립니다. 음식문화가 바뀌면 사람들의 성격도 좋아져요. 술이 가진 의미가 상당히 큰 이유랍니다.”
정 대표는 전통주의 대중화도 필요하며 젊은 양조가를 양성하려면 정부의 지원도 절실하다고 역설한다. “전통주 본질을 유지하면서 대중화시키는 문제는 저한테도 큰 과제입니다. 요즘 새로 전통주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요. 술은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데 누룩을 직접 만들 생각은 아예 안 하죠. 정제 효소도 사다 만들고 주정에 첨가물을 넣어 하이볼도 만들어요. 그걸 증류해서 새로운 기술이라고 팔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임을 그들에게만 돌릴 순 없어요. 전통주는 만들기 힘들고 시간 많이 걸리기 때문이죠. 따라서 제대로 된 전통주를 만들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해야 합니다. 정부가 표준 누룩 제조 방법을 교육하고, 양조장마다 표준 누룩방 설립을 지원하면 얼마든지 저렴한 비용으로 전통주를 만들 수 있는데 그런 지원이 없으니 매우 안타깝네요. CMB 그랑골드 수상이 증명했듯, 전통 소주도 얼마든지 해외에서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납니다.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전통주를 연구하고 사업을 지원하는 기관이 만들어지면 요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K콘텐츠처럼 우리 술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날이 크게 앞당겨지지 않을까요.”
■정회철 농업회사법인 예술 대표는
●1962년 광주 출생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법학과 졸업 ●제40회 사법시험 합격 ●변호사 ●충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통주조 예술 창업(홍천·2012년) ●저서 ‘하우스막걸리’ 출간 ●예술 춘천이전(2021년) ●농업회사법인 예술㈜ 창업 ●농특산품 포장디자인 제1회 공모전 대상 ●우리술품평회 최우수상 ●CMB 스피릿츠 셀렉션 한국 증류주 최초 그랑골드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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