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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죽음… 시대가 묻고 무대가 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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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준 선임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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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 연극대전, 주목할 만한 작품들

말벌, 두 인물이 펼치는 고도 심리전
키리에, 종교 색채 넘은 구원의 언어
뼈의 기록, 인간의 존엄·마음을 사유
빅 마더, 알고리즘 사회의 진실게임

무대가 지닌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연극이 연달아 개막하고 있다. 참신한 줄거리와 배우들 열연이 빛나는 창작부터 해외에서 각광받은 화제작까지 다양한 작품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장르는 스릴러·SF·역사극을 아우르고, 주제도 트라우마와 계급, 죽음과 존엄, 권력과 욕망, 미디어와 진실까지 넓게 펼쳐진다. 바야흐로 신춘 연극대전이 시작됐다.

 

◆밀도 높은 심리 스릴러 ‘THE WASP(말벌)’

학창 시절 이후 서로를 본 적 없던 헤더와 카알라가 20년 만에 한 카페에서 마주하며 시작되는 연극이다. 헤더는 화려한 경력과 자상한 남편, 아름다운 집을 가진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반면, 카알라는 다섯 번째 아이를 임신한 채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거친 삶을 살고 있다. 극이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과거에서 카알라는 학창 시절 헤더를 괴롭혔던 가해자 중 한 명이었다. 헤더는 그로 인해 평생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왔다. 헤더는 어색한 대화 끝에 카알라에게 거액의 현금을 대가로 뿌리칠 수 없는 위험한 제안을 던진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복잡미묘한 심리전과 권력구도의 역전이 펼쳐진다. 단 두 명의 배우가 무대를 장악하고 숨 쉴 틈 없는 심리전을 벌이는 작품이다. 영국 극작가 모건 로이드 맬컴이 2015년 런던 초연한 작품의 국내 초연이다. 학창 시절의 폭력과 트라우마, 사회적 계급 격차가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배우 겸 연출가 이항나가 정교하게 파헤친다. 헤더 역에는 김려원·이경미·한지은 세 배우가, 카알라 역에는 권유리·정우연이 나서 각각 다른 매력의 캐릭터를 빚어낸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4월26일까지.

신춘 연극대전이 시작된 공연가에서 스릴러·SF·역사극에서 트라우마와 계급, 죽음과 존엄, 권력과 욕망, 미디어와 진실까지 장르와 주제 모두 넓게 펼쳐진 작품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THE WASP(말벌·아래), ‘키리에’’의 한 장면. 각 제작사 제공· 세계일보 자료사진
신춘 연극대전이 시작된 공연가에서 스릴러·SF·역사극에서 트라우마와 계급, 죽음과 존엄, 권력과 욕망, 미디어와 진실까지 장르와 주제 모두 넓게 펼쳐진 작품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THE WASP(말벌·아래), ‘키리에’’의 한 장면. 각 제작사 제공· 세계일보 자료사진

◆‘키리에’, 죽음 앞에서 건네는 가장 숭고한 사랑

죽으러 온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독일의 검은 숲. 그 근처에 집 한 채가 있다. 30대에 과로사한 천재 한국인 여성 건축가의 영혼이 깃든 공간, 그곳에서 저마다의 사연으로 끝을 소망하는 인물들이 하나둘 찾아든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다는 마지막 신호, 어쩌면 기도이고 비명인 외침들이 그 공간을 채운다. 2023년 국립정동극장 ‘창작ing’ 프로그램으로 정식 무대화된 작품. 초연 당시 제60회 동아연극상에서 작품상과 연기상 등을 받았다. ‘철학적인 내용이지만 죽음을 보는 흔한 방식에서 벗어나 삶을 관조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한,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갖춘 작품’이라는 평단의 호평과 함께 관객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제목은 가톨릭·성공회 미사곡의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 즉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이 단어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 세상과 타인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구원의 언어로 확장된다. 이해받고 싶고 살고 싶다는 절망과 간절함이 동시에 깃든 제목은 결국 관객이 스스로 의미를 채워 넣어야 하는 단어가 된다. 초연 출연진인 최희진·유은숙·백성철·조어진·윤경이 다시 한번 뭉쳐 한층 깊어진 호흡으로 관객과 마주한다.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4월15일까지.

◆로봇 장의사가 읽어내는 ‘뼈의 기록’

극의 배경은 인류 대부분이 행성 이주 프로젝트를 통해 지구를 떠난 2085년의 미래다. 전력마저 끊길 위기에 처한 지하 영안실에서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비스’는 자신이 수습해온 시신들의 기록을 열어본다.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인 로비스는 뼈에 새겨진 굴곡과 상처, 반복된 흔적들을 통해 고독사한 노인이나 사고로 숨진 소년 등 망자들의 고유한 삶을 읽어낸다. 그는 장례식장 청소부 ‘모미’와의 대화를 통해 ‘죽음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며, 인간의 존엄과 마음의 의미를 사유한다.

독보적인 SF 감수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소설가 천선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신작이다. ‘천 개의 파랑’, ‘밤에 찾아오는 구원자’에서 천선란 작가와 호흡을 맞췄던 장한새 연출이 다시 한번 지휘봉을 잡아 원작의 문학적 깊이를 무대 위로 확장한다. 여기에 이해인 작가가 각색으로 참여해 안드로이드의 시선으로 본 인간의 삶을 밀도 있게 재구성하며 극의 완성도를 높였다. 주인공 로비스 역에는 세 명의 배우가 트리플 캐스팅되어 각기 다른 매력을 선보인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과 연극 ‘온 더 비트’ 등에서 존재감을 과시해온 강기둥과 연극 ‘붉은 낙엽’, ‘벚꽃동산’ 등에서 연기력을 입증한 장석환이 무대에 오른다. 또한 드라마 ‘종이의 집: 공동경제구역’과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을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배우 이현우가 안드로이드 연기에 새롭게 도전한다.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4월4일부터 5월10일까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대의 진실 ‘빅 마더’

정치·미디어·빅데이터 그리고 인공지능(AI) 알고리즘이 결합된 동시대의 감시 사회를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내는 작품이다. 프랑스 극작가 멜로디 무레의 화제작을 이준우 서울시극단 단장이 취임 후 첫 연출작으로 선보인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현직 대통령의 성추문 영상이 공개되면서 벌어지는 뉴욕 탐사보도매체 기자들의 사투가 무대에서 펼쳐진다. 기자들은 영상의 진위를 추적하던 중 배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조작 시스템과 딥페이크, 여론 조작의 실체를 목도하게 된다. 무엇이 사실인지보다 누가 그 사실을 어떻게 믿게 만드는가가 더 중요해진 시대에서 진실이 작동하는 방식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이준우 연출은 작품 발표회에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말하기보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와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를 바라보는 작품”이라며 “관객 각자가 자신만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질문을 가져가길 바란다”고 설명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4월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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