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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의 미래] 기후정치를 만드는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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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정부 ‘에너지 지산지소’ 공식화
최근 설문응답 절반 ‘기후 유권자’
‘이대남’ 기후정책 적대적은 편견
기후 의제 다루는 정치 지형 필요

‘헵타포드 B’를 습득하는 동안 나는 그에 못지않게 이질적인 경험을 하고 있었다. 나의 사고가 도형의 형태로 코드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 내가 이 언어를 점점 더 유창하게 다룰 수 있게 되면서 이 의미 표시 형태들은 완성된 형태로 나타났고, 나는 복잡한 개념들까지도 일거에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SF소설에선 언어가 줄거리의 핵심 열쇠일 때가 많다. 다른 존재나 외계와의 접촉을 다루는 장르이다 보니 이질적인 세상을 잇는 장치로 언어가 등장한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도 그렇다. 언어학자인 주인공은 지구에 나타난 외계 지성체 ‘헵타포드’와 소통하기 위해 그들의 언어인 ‘헵타포드 B’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들의 언어는 시작과 끝이 없는 비선형 구조이며, 시작과 끝이 없으니 시간 개념도 과거-현재-미래 대신 모든 사건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동시성을 띤다. 주인공은 헵타포드 B를 배우며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게 된다. 언어는 단지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윤지로 비영리 미디어단체 클리프 대표
윤지로 비영리 미디어단체 클리프 대표

최근 발표된 ‘기후정치바람’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서도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기후정치바람은 로컬에너지랩과 녹색전환연구소, 더가능연구소가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 문제를 선거 핵심 의제로 다루기 위해 구성한 정책 네트워크다. 2024년 총선, 지난해 대선에 이어 올해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3차 설문조사를 벌였다. 유권자 1만7865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규모 프로젝트다.

이번엔 최근 에너지 수급에서 중요한 화두가 된 지산지소(지역생산·지역소비) 관련 문항이 포함됐다. 원래 로컬푸드 운동에서 주로 썼던 이 용어는 2010년대 말부터 에너지 분야에서 드문드문 등장하다 이재명정부 들어 정책 방향으로 공식화됐다. 지방에서 만든 전기를 송전탑으로 끌어올려 수도권에 공급하는 ‘에너지 식민지’에 관한 문제의식은 예전부터 있었다. 2010년 전후 벌어진 밀양 송전탑 사태가 대표적이다. 송전탑과 원전, 방폐장, 농지·산지 태양광 등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갈등은 수도권을 향해 “너희가 쓸 전기, 너희가 만들어라”라는 구호로 요약됐다. 수도권과 지역의 불균형을 ‘고발’하는 게 핵심이다. 이에 비해 에너지 지산지소는 지역에 기업을 유치·이전해 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맞추자는 ‘원칙’을 강조한다. 지산지소라는 말로써 갈등 현안을 원칙의 문제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번 설문에서 근거리 전력공급이나 지역별 차등전기요금제, 용인산단 이전에 수도권과 지역에서 모두 압도적 지지여론이 나온 건 이 같은 인식 변화를 반영한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점은 부정적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OO남, OO녀처럼 특정 집단을 하나의 이미지로 박제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대남’은 나에겐 헵타포드만큼이나 낯선 존재다. 극우화된 이대남을 떠올리며 그들의 이번 설문 답변을 봤다. 스스로 생각하는 정치 성향은 70대만큼이나 보수적이고 기후공약에 표를 던지겠단 비율도 가장 낮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은 기후정책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전기요금 차등화나 교통부문 탄소감축 방안, 공공기후보험 도입 등 판단을 요하는 여러 질문에서 ‘잘 모른다’는 응답률이 다른 세대보다 많거나 ‘반대한다’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정말 모르는가 하면, 특정 사안이나 용어에 대한 ‘인지’를 묻는 문항에선 다른 세대보다 점수가 결코 뒤지지 않았다. 혹시 나처럼 ‘젊은 남성은 기후정책에 적대적일 것’이라 생각했다면, 이대남이라는 이름 탓일지 모른다.

언어의 힘은 강하다. 언어는 사고의 틀을 만든다. 이번 설문에서 응답자의 53.5%는 정당보단 기후공약을 보고 투표하겠다고 했다. 시민사회단체는 그들을 ‘기후 유권자’라 명명한다. 이 말이 부디 기후의제가 선거에서 대접받는 정치적 지형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

*이번 조사는 로컬에너지랩이 메타보이스와 피앰아이에 의뢰해 이메일로 설문 링크를 발송한 뒤 응답을 듣는 방식으로 지난달 2∼23일 이뤄졌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윤지로 비영리 미디어단체 클리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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