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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 식당 가정집, 정비소… 쓰임의 미학따라 변모한 건물의 모습 성수동의 역사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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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어니언 성수

공장형 도심과 ‘핫플’의 생경한 공존
지루하지 않은 민낯 고스란히 간직해

풍화의 속도를 멈춘 찰나의 안도감
정보과잉에 지친 현대인들 위로

해마다 신년이 되면 다양한 마케팅회사들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포착한 트렌드 예측을 앞다투어 내놓는다. 그중 필자가 가장 유심히 살피는 지표는 글로벌 색채 연구소 팬톤(Pantone)이 발표하는 ‘올해의 컬러’다. 정치, 경제, 라이프스타일 등 사회 전반적인 기류를 하나의 색으로 치환하는 팬톤의 선정 이유를 읽다 보면, 올해의 트렌드를 예측하는 재미를 넘어 그 색과 어울리는 도시 공간은 어디일지 생각해 보는 즐거움이 쏠쏠하기 때문이다.

 

팬톤이 선정한 2026년의 컬러는 ‘클라우드 댄서(Cloud Dancer)’이다. 구름의 흐름을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화이트 톤은 지나치게 따뜻하지도, 그렇다고 서늘하지도 않다. 팬톤의 전무이사 리트리스 아이즈먼(Leatrice Eiseman)은 이 색을 두고 몇 년간 누적된 디지털 피로와 정보 과잉에 지친 현대인을 위한 일종의 ‘해독제’이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캔버스처럼 새로운 가능성 을 열어두는 ‘초기화(Reset)’의 도구라고 설명한다.

빠르게 변하는 성수동에서 어니언 성수는 1970년대 처음 지어진 이후 필요에 따라 덧붙여지고 개조된 흔적과 10년 전 개장 당시 설정했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본질을 지키고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성수동에서 어니언 성수는 1970년대 처음 지어진 이후 필요에 따라 덧붙여지고 개조된 흔적과 10년 전 개장 당시 설정했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본질을 지키고 있다.

팬톤이 올해의 컬러로 역사상 처음 흰색 계열을 선정함으로써 던지는 메시지는 복잡한 세상에서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본질’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이는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제안한 ‘근본이즘’과, 한국경제신문이 도출한 ‘리스타트(Re:Start)’와 그 맥을 같이한다. 콘텐츠와 상품의 홍수 속에서 진짜와 원조를 찾는 소비자들의 욕구(근본이즘), 근본에서 브랜드의 핵심가치를 회복하는 변화(리스타트)가 ‘클라우드 댄서’라는 색으로 발현된 셈이다.

 

그럼, 공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를 학술적으로 논하자면 크게 세 가지 개념을 언급할 수 있다. 첫째는 비어 있는 ‘사이’에서 사람이나 사물이 관계를 맺을 때 의미가 생기는 ‘공간(空間)’이다. 둘째는 물리적 좌표 위에 무한히 확장하는 3차원 영역인 ‘스페이스(Space)’이다. 마지막은 벽과 경계로 둘러싸인 구체적인 장소에서 행위를 수용하는 독일어 ‘라움(Raum)’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은 차치하고 조금 더 직관적으로 바라보자. 팬톤이 ‘클라우드 댄서’를 통해 색을 덜어냈듯, 건축에서도 덧입혀진 화장을 지우는 시도가 있다. 바로 벽체의 내외부 마감재를 걷어내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골조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이 투박하고 거친 민낯 앞에서, 역설적으로 공간의 가장 순수한 본질을 마주하기도 한다.

 

장식을 배제하고 소재의 물성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미학은 고도성장기 이후 거품 경제의 붕괴를 겪은 일본에서 먼저 태동했다. 1970~80년대 도쿄가 ‘위대함’과 ‘마천루’를 좇으며 팽창했다면, 거품이 꺼지고 장기간의 경기 침체가 이어지면서 저층, 작음, 낡음 심지어 폐허를 좇는 경향이 나타났다. 건축가 구마 겐고(Kuma Kengo)는 이를 ‘삼저(三低)주의’의 도래라고 정의했다. 노출 콘크리트로 현대적 살림집의 원형을 제시했던 안도 다다오(Ando Tadao)의 작업이 이때 주목받은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서울에서 가장 빠르게 변하는 성수동에 있는 ‘어니언 성수’는 역설적으로 1970년대 지어진 건물과 이후 슈퍼마켓, 식당, 가정집, 정비소, 공장으로 바뀌면서 덧붙여지고 개조된 흔적을 품고 있다. 이곳을 설계한 패브리커(Fabrikr)는 도심 제조업 밀집지에서 트렌드의 최전선으로 변모한 동네의 기존 모습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해석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과거의 구조 속에서 새것이 줄 수 없는 가치를 발견했다. 바닥에 묻은 페인트 자국과 필요에 따라 덧대어진 벽돌 한 장 한 장을 세월이 남긴 소중한 기록으로 간주하고 이 모든 흔적을 공간의 주인공으로 되살리는 데 집중했다.

 

무엇보다 패브리커가 주목한 어니언 성수의 본질은 건물들이 그때그때 늘어나면서 생겨난 ‘유기적 구조’에 있다. 단일한 평면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건물이 덧붙여지며 형성된 이 공간은 미로처럼 깊고 다층적이다. 과거 공장이나 정비소로 쓰였던 공간은 넓지만 이후 식당이나 가정집으로 바뀐 공간은 작고 빽빽하다. 패브리커는 이러한 공간의 변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계단과 루프탑에 난간을 설치하고, 곳곳에 다양한 크기의 가구를 배치했다. 이는 공간의 증식을 돕고 카페를 찾은 손님들이 자신만의 구석을 발견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장소를 향유하도록 유도한다.

 

특히, 어니언 성수에서 가장 넓은 공간인 빵과 음료를 파는 전면 공간과 가장 안쪽에 있는 뒷마당은 큰 가구를 오브제처럼 배치해 자잘한 나머지 공간들과 대비되는 특성을 살렸다. 이런 시도는 단일 오브제를 거대한 공간의 축소판으로, 큰 공간을 단일 오브제의 확장으로 보는 패브리커 특유의 관점이 투영된 결과다.

가장 넓은 실내인 전면 공간
가장 넓은 실내인 전면 공간
어니언 성수의 루프탑
어니언 성수의 루프탑

핫플레이스가 넘쳐나는 성수동에서 어니언 성수만이 갖는 유일함은 ‘스케일의 공존’이다. 과거 공장이나 창고로 쓰였던 크고 넓은 공간뿐만 아니라 그 공간을 보조해 주었던 잘게 나뉜 공간까지 그대로 살렸다는 점이 핵심이다. 설계자는 오브제를 공간 전체에 쏟아 놓는 대신 공간의 크기와 성격에 맞춰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손님들에게 여러 장면을 마주할 수 있게 했다.

 

솔직히 성수동의 외부공간은 한적히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부리기에 적당한 환경은 아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공장의 낡은 슬레이트 지붕과 그을음이 묻은 시멘트벽, 그리고 보차 구분 없는 도로는 사람과 자동차, 오토바이가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니언 성수의 마당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바뀐다. 다양한 크기의 가구 사이로,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 거칠게 심어진 식물들이 주는 생동감은 기묘한 안도감을 준다. 이곳의 외부공간은 주변의 번잡함과 물리적으로 맞닿아 있으면서도 정서적으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중립적인 섬’과 같다.

 

서울의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성수동만의 다름은 여전히 운영되는 공장의 근로자들과 핫플레이스를 찾아온 사람들이 자아내는 묘한 긴장감이다. 나는 이질적인 두 집단이 서로를 의식하며 빚어내는 이 생경한 공존이야말로 성수동의 진정한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어니언 성수에서 이를 가장 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바로 루프탑(Rooftop)이다. 루프탑에서 내려다보는 시선과 길 위 혹은 건너편 공장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두 세계는 서로 대놓고 마주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시공간을 점유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10년 전 어니언 성수가 처음 생겼을 때, 특색 있는 공간이 임시변통으로 생겼다가 사라지는 성수동에서 어니언 성수가 어떤 포지셔닝(Positioning)을 할지 쉽게 예상할 수 없었다. 다만 어니언 성수가 처음 설정했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본질’만큼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랐다. 건물의 갈라진 틈 사이로 바람이 실어 나른 씨앗이 싹을 틔운 듯한 식재조차,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풍경처럼 그대로 지켜지기를 원했다. 사실, 과거의 시간을 품은 건축물을 보여주는 것보다 어려운 일은, 가장 보기 좋은 시점에서 풍화의 속도를 멈춰 세우는 일이다. 낡음을 유지하되 부식되지 않게 하는 그 팽팽한 긴장감이야말로 재생 건축의 가장 난해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설계자의 바람대로 어니언 성수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삶의 영감을, 누군가에게는 온전한 휴식을 선사하는 곳으로 기억되기” 위해서는 ‘지루하지 않은 민낯’을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 양파(어니언)는 날것일수록 깔 때 눈물이 더 나는 법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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