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교리로 남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으로 내려오는 종교다. 후자는 믿음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삶과 관계, 사회 질서 속에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사건 종교는 언제나 문제 종교가 된다. 그것은 교리가 불순해서도, 신앙이 비이성적이어서도 아니다. 이유는 외려 정반대다. 사건 종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기독교 이전의 예수 운동, 출애굽 신앙, 초기 불교, 이슬람은 모두 사건 종교였다. 문제는 사건 종교가 믿음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삶과 관계, 사회 질서 한복판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사회는 늘 그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예수는 본래 교리를 남기려 했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체계적 신학을 설계하지 않았고, 조직 종교를 세우지도 않았다. 예수의 메시지는 말이 아니라 삶이었다. 원한 없는 사랑, 심판 없는 용서, 내세 계산 없는 현재의 실천이었다. 그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고 삶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예수의 삶은 끝까지 완결되지 못했다. 그는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혈통을 남기지 못했으며, 역사 속 질서로 정착하지도 못한 채 십자가에서 생을 마쳤다. 사건은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그 공백을 메운 인물이 바울이다.
생전에는 예수를 만나지 못했지만, 부활한 예수에게 부름받아 이방인을 향해 파송된 사도였던 바울은 예수의 실패를 신학적 승리로 전환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구원의 조건이 되었고, 역사적 좌절은 내세적 보상으로 재구성되었다. 그 덕분에 기독교는 살아남았고 세계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의 삶은 ‘따라야 할 길’이 아니라 ‘믿어야 할 교리’로 대체되었다. 사건은 관리 가능한 신앙 체계로 봉합되었고, 구원은 설명의 영역으로 이동했다. 기독교는 사건종교에서 벗어났다.
니체는 바로 이 지점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그가 공격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바울 이후의 기독교였다. 니체에게 비친 기독교는 실패와 고통을 미화하는 도덕 체계였다. 그는 예수라는 인물을 일정 부분 존중했다. 원한 없이 살았고, 심판을 유예했으며, 지금 여기의 삶을 긍정했던 인간으로서의 예수였다. 그래서 니체는 역설적으로 ‘예수의 13번째 제자’로 불린다. 교회를 세운 제자들이 예수를 교리로 남겼다면, 니체는 그 교리를 부수어 예수의 삶, 예수의 운동을 되살리려 했기 때문이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신의 부정이 아니라, 살아 있던 복음이 교리로 굳어버린 상태에 대한 사망 선고였다. 다만 니체는 폭로와 종결에 머물렀다. 그는 사건이 왜 실패했는지는 보았지만, 그것을 다시 역사 속에 세울 방법은 갖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통일교는 전혀 다른 선택지로 등장한다. 통일교는 바울 이후 굳어진 교리 중심의 신앙을 넘어서면서, 니체가 제기한 종교 종결의 문제의식 또한 통과한다. 통일교는 예수의 십자가는 완결된 구원이라기보다, 아직 완성되어야 할 역사로 이해된다. 구원은 개인의 믿음에 머무르지 않고, 관계와 구조가 회복되는 과정으로 재정의된다. 참부모는 가정을 이루고 선의 혈통을 남기는 삶을 통해 사건을 현실에 정착시키는 주체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 사회 안에서 검증되는 사건의 형태를 갖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통일교는 ‘사건 종교’로서의 부담을 온전히 떠안는다. 통일교의 핵심은 축복결혼을 통해 참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래 인류 한 가족’이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의 관계 재구성을 지향한다. 축복결혼이 특정 교단의 의례를 넘어 인류 보편의 질서로 확장되는 순간, 통일교적 사건 종교는 역설적으로 종교로서의 긴장을 내려놓을 가능성도 있다. 더 이상 ‘가르칠 교리’도, ‘확장할 종교’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사건 종교는 그때 스스로를 소멸시키는 방식으로 완결될 수 있다. 그래서 통일교는 성공하면 사라져야 하는 종교를 지향한다. 사건 종교에서 법맥은 개인에게 이전되지 않는다. 말이나 직위, 혈연 승계로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법맥은 이미 한 번 현실에서 성립된 구조 속에 고정된다. 참부모, 참가정, 축복결혼, 혈통 복귀라는 틀 자체가 그것이다. 이후의 리더십과 행정은 그 구조를 관리할 뿐, 법맥을 새로 만들 수는 없다.
사건 종교는 언제나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실패할 가능성도 감당해야 한다. 비판을 피할 권리도 없다. 그래서 통일교의 논쟁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다. 그것이 사건으로 내려온 대가이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사건 종교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통일교가 가는 길이 어려운 이유는 사회와 타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세상이 몰라줘서도 아니다. 인류의 구원을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삶으로 완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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