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그라모폰’이 매년 12월호에 싣는 ‘크리틱스 초이스’는 영리하면서도 매혹적인 기획이다. 한 해 동안 쏟아진 클래식 음반 가운데 각 평론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한 장을 골라 독자에게 권한다. 가을의 ‘그라모폰 어워드’가 심사위원단의 공식 투표와 합의로 부문별 수상작을 가르는 객관적 행사라면, ‘크리틱스 초이스’는 취향의 결을 숨기지 않는, 말하자면 친밀한 추천 목록이다.
그라모폰의 필진으로 활동 중인 나 역시 이 즐거운 고민에 동참했다. 나는 장-에플람 바부제의 ‘라벨: 피아노 독주곡 전곡’을 꼽았다. 올해 라벨 탄생 150주년이라는 시의성은 차치하고라도, 그 투명한 색채감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고를 송고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선정 앨범 목록을 훑다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동료 평론가 데이비드 거트먼이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올해의 음반으로 꼽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이라는 묵직한 헌사를 바친 것이다.
해외 평론가와 임윤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 그를 둘러싼 국내외 온도 차를 실감한다. 통상 ‘팔이 안으로 굽는’ 내셔널리즘의 수혜를 입기 마련이나, 임윤찬의 경우 이 역학은 흥미롭게 전복된다. 한국에서의 열광도 뜨겁지만, 냉정하기로 소문난 서구 비평계가 그에게 보내는 찬사는 단순한 호평을 넘어 경이에 가깝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특별하게 만드는 것일까. 아마도 답은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을 것이다.
클래식 명곡에는 바둑의 정석처럼 오랜 세월 축적된, 서로 다른 미학적 지향을 지닌 몇 갈래의 굵직한 해석 계보가 공존한다. 많은 연주자가 이 중 자신의 기질에 맞는 전통을 선택해 학습한 뒤, 몇 가지 아이디어를 덧붙여 자신의 스타일로 체화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연주가 탄생하곤 하지만, 임윤찬은 이 안전한 포석을 따르지 않는다. 그는 알파고처럼 기존의 어떤 갈래에도 속하지 않은 채 원점에서 사유하며, 마치 악보가 방금 쓰인 것처럼 무에서 유를 길어 올린다.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기 2년 전, 그의 스승 손민수 교수의 연습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임윤찬의 연주에서 남다른 기질을 감지해 그 잠재력에 대해 손 교수에게 물었다. 손 교수는 제자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는 아끼면서도 자신의 교육 철학만큼은 분명히 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요즘 나오는 세련된 녹음 대신, 잡음이 지글거리는 옛 거장들의 낡은 음반을 듣도록 권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매끈하게 정제된 기술적 완성도보다, 잡음 너머에 살아 숨 쉬는 음악의 본질과 직면하라는 주문이었다. 스승이 강조했던 그 야생의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임윤찬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구축한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올해 그가 무대에 올린 레퍼토리가 이를 증명한다.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는 굴드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아리아의 호흡과 변주의 궤적을 새로 설계해 자신만의 건축을 세웠다.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4번에서는 작곡가조차 확신하지 못했던 서정과 균형을 끌어올렸고, 악장 사이의 균열을 설득력 있는 서사로 봉합했다. 지난 4일 대니얼 하딩이 지휘한 산타 체칠리아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예술의전당 무대에서도 라벨 협주곡 G장조를 통해 관습적인 재즈의 뉘앙스를 조금 덜어내는 대신, 음색의 대비와 리듬의 탄력을 전면에 내세워 곡을 재구성했다.
세계가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누군가의 뒤를 따르는 자가 아니다. 노이즈 섞인 옛 음반 속 거장들이 그랬듯, 오직 자신의 소리로 새로운 길을 낸다. 우리가 그의 연주에서 느끼는 전율은, 기존의 해석을 개선해서가 아니라 곡을 완전히 다시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스피커에서 지글거리던 그 낡은 녹음들이 품고 있던 야생의 힘이, 지금 이 젊은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다시 울리고 있다.
이상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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