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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소설을, 소설가가 시를 썼다”… 국내 출판계 최초 시도 문학적 크로스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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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2-04 10:17:29 수정 : 2025-12-04 10:17:28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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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걸북스 문학선 ‘소설가의 시’, ‘시인의 소설’ 출간
소설가와 시인 15명 문학적 경계 허문 장르 확장 시도
마감 전후로 6명의 작가 포기… “만만치 않아”
“시인이 소설을, 소설가가 시를….”

 

소설가들은 응축된 언어로 창작시를 쓰고, 시인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서술 방식으로 소설을 쓴 시리즈 두 권이 최근 출간됐다. 잉걸북스(대표 신승철)의 ‘소설가의 시’, ‘시인의 소설’은 국내 출판계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문학적 크로스오버 개념 시리즈로 신선한 기획으로 평가받고 있다.

잉걸북스 문학선  ‘소설가의 시’, ‘시인의 소설’

이 시리즈는 소설가와 시인이 각자의 영역에서 구축해온 문학성을 걸고 발표한 작품들이어서 문학적 영역의 확장과 다양성을 환기한다. 소설가들은 서사의 요소를 시에 투영하고, 시인들은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에 운율을 지켜내면서도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역량을 보여 흥미를 끌고 있다. 소설가와 시인들은 사자와 악어의 싸움처럼 각자의 방식을 땅 위와 물속의 무대로 이끌며 작품을 풀어간다.

 

‘소설가의 시’에는 시를 발표한 적이 없는 소설가 권재이, 서하진, 은미희, 전경린, 한창훈 등을 비롯해 시 발표로도 주목을 받았던 김도언, 김태용, 문형렬, 이만교, 이명랑 등 10명이 참여했다. 모두 49편이 실린 소설가들의 시는 일상적인 관찰부터 불안, 상실, 사회성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저리세요?/어머니의 손을 조근조근 주물러 본다./아프다, 야야, 아프다, 하면서도/어머니는 손을 빼지 않으신다./슬픔이,/꼭 눈물만으로 나오는 건 아니다.”

김이듬 시인.  

서하진의 ‘어머니’는 운율을 지키고 응축된 언어를 활용하면서도 서사적 구조를 따라간다. 아울러 서하진은 다른 시편에서도 가족이라는 강가에 투망을 드리우고 일상과 과거를 오가는 기억을 포집하여 어머니와 이웃과 세 자매와 딸의 역사를 전통의 방식으로 아련하게 기록한다.

 

반면에 특유의 여성적이고 섬세한 문체로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던 전경린은 ‘보통의 외로움’을 통해 젊은이의 외로움부터 시작해 빈 서랍처럼 홀로 되는 노인의 ‘안 외로움’까지 단계적으로 묘사하면서 사유의 깊이를 드러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세상에 빈 곳이 없는 것처럼/외로움도 자신 하나로 딱 맞게 채워진다는/풍문이 돌아. 외로움도 친해지면 어느새/목을 적시는 물처럼 그윽하게 달기도 하다지./그때는 독백하며 웃기도 한다지./사는 게 사는 의미라며.”

강정 시인.

최근의 사회성을 투영한 시들로 가득한 권재이, 노동의 고통과 계엄을 배경으로 한 폭력성을 다룬 한창훈, 이별 뒤의 극심한 통증을 ‘삶의 통과세’로 여기는 은미희의 시들도 서사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특징을 보인다. 아울러 시의 전략과 전술을 일찍 간파한 김도언, 김태용, 문형렬, 이만교, 이명랑의 신작 시들도 눈길을 끈다.

 

‘시인의 소설’에는 강정, 김이듬, 박정대, 이승하, 전윤호 시인 5명의 중편과 단편이 실렸다. 시인들 또한 소설가들처럼 자신들에게 유리한 무대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시의 장점을 소설에 투영하는 방식인데 작품의 첫 문장에서 그 특징이 드러난다.

 

유나라는 인물은 내게 각별한 존재다.(‘유나’, 강정)/잘 지내다 가요.(‘불과 비’, 김이듬)/이 소설은 한 편의 시에서 시작되었다(‘눈의 이름, 1644년 파리 무용총서’, 박정대)/아내가 사라졌어.(‘카지노의 별과 달’, 이승하)/청량리에서 첫차를 타고 네 시간쯤 달려 심산읍에 도착했을 때, 햇빛은 아직 역의 통로를 완전히 건너지 못한 채 바닥에서 부서지고 있었다.(‘창귀’, 전윤호)

전경린 작가.

첫 문장에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작품을 더 읽을지 말지를 판단하게 만들고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성까지 담아내고 있다. 강정은 유나라는 존재의 모호성과 화자가 인식하는 현실의 비실재성을 탐구한다면, 김이듬은 시간강사 개인의 정직성과 예술적 정체성을 훼손하는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주제를 드러낸다.

 

심지어 박정대는 문장마다 마침표가 없고 문장과 문장은 쉼표가 이어줄 뿐이어서 한 편의 장시를 연상시킨다. 이번 작품을 위해 지방에 위치한 카지노를 직접 취재하여 작품을 완성했다고 밝힌 이승하는 돈과 도박이라는 인간의 욕망과 윤리적 딜레마를 냉정하게 관찰한다. 트라우마가 언어와 존재에 미치는 영향을 완성도 높게 다룬 전윤호는 처음 써본 작품이라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다.

 

‘소설가의 시’에 대해 시인 류근은 “모든 장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시와 소설의 담장이 허물어진 시대라 해도 이토록 자명하게 그 좌표를 보여 주는 책이 등장하다니 놀랍다”고 평가했다, ‘시인의 소설’에 대해 소설가 하성란은 “시인의 언어가 어떻게 서사의 공간을 재구성하는지, 확인하는 순간순간마다 경이롭다. 시인의 소설은 단지 장르의 이동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계와의 거리를 다시 조정하는 특별한 순간”이라고 언급했다.

한창훈 작가.

이번 시리즈를 기획한 이는 오랜 기간 작가로 활동하던 신승철. 그가 출판사 대표로 변신한 후 처음으로 내놓은 실험작이다. 그는 “ ‘소설가의 시’ 원고를 의뢰받은 소설가 6명이 마감 전후로 포기하는 바람에 필진을 바꾸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술영역에서 크로스오버가 대세인 상황에서 문학인들도 변화하는 창작생태계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소설과 시의 경계 허물기를 시도했다”며 “출간 후 주변에서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넘고, 대중음악과 클래식을 과감하게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보컬 오디션 TV 프로그램 ‘팬텀싱어’의 문학 버전이라는 신선한 평가도 있어 고무적”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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