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
아파트라는 허공의 둥지서 살다가
은퇴 후 고향 돌아와 유유자적한 삶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지 곱씹게 돼
“나에게 오는 언어 더 잘 모시고 싶어”
있던 꽃을 더 아름답게 하는 것도, 그렇다고 꽃밭의 위상을 높이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쓸데없고 무용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당의 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 생각하느라 가을 한 철을 거의 다 보내고 있었다.
궁리 끝에, 시인 안도현은 마사토 한 트럭을 주문했다. 40년 동안 거주했던 전주를 떠나 고향인 예천으로 돌아온 뒤 텃밭을 가꾸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상을 보내오던 그였다. 그는 덤프트럭이 마당에 부어놓은 마사토를 삽으로 떠 꽃밭에 넣은 뒤 돌을 고르고 있었다.
이때 동네 친구가 찾아오면서 의도치 않은 수작을 벌이게 된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사느라 만나지 못하다가 귀향한 뒤 다시 만난 농사 친구였다. 불교 선문답 같은 두 사람의 대화는 마지막에 깜짝 놀랄 반전을 맞는다. 툭, 하고 한 편의 시가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꽃밭을 높여보려고 한다니까/ 시인은 원래 이렇게 쓸데없는 일 하는 사람인가, 하고 물었다/ 꽃들의 키를 높이는 일, 그거/ 쓸데없는 일이지, 혼자 중얼거렸다/ 서리 오기 전에 배추나 서둘러 뽑으라 하였다//나는 다음에 톱밥이나 한 포대 사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톱밥은 뭐에다 쓸라꼬?/ 닭똥 치우고 나서 거기 깔아주려고 하네/ 그러자 이제는 병아리 키 높이는 일을 하려고 하는구먼, 하고 웃었다/ 나는 동무에게 자네도 시인 다 되었네, 하였다”(‘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 부문)
애송시 ‘너에게 묻는다’를 비롯해 소박한 일상과 자연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는 섬세한 감성과 따뜻한 시선의 시인 안도현(64)이 ’꽃밭을 한 뼘쯤 돋우는 일을’를 비롯해 71편의 시를 묶은 신작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문학동네)를 발표했다. 그의 12번째 신작 시집.
안 시인은 4부로 이뤄진 이번 시집에 작고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시편부터 귀향 이후의 일상을 다룬 작품과, ‘북’의 이미지를 담은 시편 등을 담았다. 전주에서 예천으로 귀향하고, 어머니가 작고하고, 생전 처음 병원을 드나들고, 오래 밥을 빌던 학교를 그만둔 뒤 삶의 궤적과 닿아 있다.
그는 이들 시편을 통해 무엇이 쓸데없고 의미 없는 일이고, 무엇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존재인지,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지를 곱씹게 한다. 즉, “정말 약한 것들의 편에 서서 노래를 불렀을까”(‘순간 정지’) 하고 성찰하기도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을 쓰고 나니/ 나는 더 편안해졌다”(‘연민’)고 느끼기도 하며, “나는 쓸모없는 걱정을 하다가 가장 쓸모없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흰목물떼새’).
시인 안도현은 왜 작고 쓸모없고 의미 없는 존재들에 주목하게 된 것일까. 그가 보고 느끼고 그린 작고 쓸모없는 존재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안 시인을 지난달 30일 문자 메시지와 전화로 만났다.
―이번 시집에선 자유자재의 어떤 시적 경지가 느껴지는데,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
“거의 평생을 아파트라는 허공의 둥지에서 살다가 5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땅에 착지를 하고 살게 되었다. 마당과 텃밭과 연못과 돌담이 일상이 되니,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더라. 아침마다 창을 열면 새소리가 무진장 쏟아져 들어오는데, 이 새소리를 보자기에 싸서 누구에게 좀 보낼까 싶을 때도 많았다. 앞으로도 시를 쓰는 저보다 제게 오는 언어를 더 잘 모시고 그 언어를 덜 간섭하고 잘 따라가도록 내버려두고 싶다.”
시집은 투병 끝에 최근 작고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담은 시편으로 문을 연다. 다만 그가 모친과의 이별에서 오로지 슬픔과 아쉬움만을 발견한 건 아니었다. 어머니가 작고한 뒤에 글이나 행동이 더 자유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그는 고백한다.
“당신의 장롱과 당신의 옷을 분리하고 당신의 부엌에서 당신의 수저를 떼어내고 면사무소에 가서 이름을 지웠어요// 저는 이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문법을 잊고 마음껏 미끄러질 수 있게 되었어요/ 쨍한 코끝으로 연못 위에 문장을 쓸 수 있게 되었어요”(‘연못 위에 쓰다’ 부문)
―작고한 어머니를 노래한 시편이 적지 않은데.
“어머니의 죽음을 시를 쓰는 자식으로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는 지난 몇 년 동안의 숙제였다. 어머니는 마흔두 살에 남편을 잃고 아들 넷을 고생하면서 키운 분이시다. 그 신고의 삶에게 바치는 나의 언어는 어떤 꼴을 해야 하는가,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가는 그 순간의 거리는 얼마인가, 사적인 체험과 객관적인 평정심의 관계는 어찌 설정해야 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쓰게 되었다.”
이번 시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역시 예천으로의 귀향 이후 일상을 다룬 시편들이다. 닭을 키우고(‘장닭’), 풀을 뽑다가 벌에 쏘이거나(‘벌에 쏘인 이야기’), 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물총새를 땅에 묻거나(‘간단하고 명료한’), 장에 나가 열무씨를 사는(‘열무씨 이천원어치에 대하여’) 시인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냇가에 사는 흰목물떼새가 마당 안까지 냇물을 끌고 왔다 새는 목덜미가 하얘질 때까지 울었는데 울음소리가 가볍다// 새야, 구절초 씨앗 뿌려놓은 꽃밭은 기웃거리지 말아라 씨앗을 다 쪼아먹으면 나는 내후년 가을에 어떡하노?// 나는 쓸모없는 걱정을 하다가 가장 쓸모없는 일이 가장 귀한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 땅에 떨어진 깃털이 새의 윤곽이라는 말을 들었다, 라고 쓴다”(‘흰목물떼새’ 부문)
―어느 겨울 끝자락에 만난 ‘흰목물떼새’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절창이다.
“예천 집 앞에 내성천이라는 낙동강 지류가 흐른다. 해마다 4월이 되면 멸종위기종인 흰목물떼새가 강변 자갈밭에 알을 낳아둔 것을 산책하다가 가끔 본다. 흰목물떼새는 자갈밭에 자갈 모양과 빛깔과 유사한 알을 낳는데, 그게 너무 신기해 첫해는 여러 차례 알을 보러 나갔다. 지인들을 데리고 가서 보여주기도 했고. 그런데 부화 시기가 지났는데도 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더라. 어미는 보이지 않고. 그게 틀림없이 지나치게 관심을 보인 제 탓이라고 저는 생각했다. 새와 저의 관계를 비롯해 닭장에서 십여 마리 키우는 닭들과의 거리, 길가의 산국꽃과 저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시를 쓰고 싶을 때가 많아진다.”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안도현은 시 ‘낙동강’이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시작으로 ‘모닥불’,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북항’,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기러기는 차갑다’ 등의 동시집과, ‘연어’, ‘물고기 똥을 눈 아이’ 등의 동화, ‘백석평전’ 등의 논픽션을 각각 저술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는 매일 오전 5시가 되면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를 들으며 세 시간 정도 글을 쓰거나 이메일을 통해 일을 한다. 오전에는 풀을 뽑거나 집안일을 하고, 오후에는 강연을 가거나 산책을 나간다. 가끔 집 주위에 출몰하는 멧돼지를 조우하는 건 덤. 저녁에 반주 한 잔 하고 오후 9시쯤 일찍 잠을 청하는 시인 안도현은, 다시 새벽이면 어김없이 새 소리를 들으며 글을 쓴다. 해가 뜨면 고개를 들어 내성천을 보기도 할 것이고, 가끔은 그곳을 찾는 흰목물떼새 부부를 만날 것이다. 그리하여 시의 순간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때론 쓸데없이 눈부시게, 혹은 찬란하게.
“흰목물떼새 부부는/ 자갈밭에 낳아둔 알이 서러웠다// 내 그림자를 보고 십 미터쯤 높이의 허공을 도려내며 다급하고 둥글게 울었다”(‘내성천 흰목물떼새 부부에 대하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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