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2월 25일 김영삼(YS)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해외 동포들을 향해 “금세기 안에 조국은 통일되어 자유와 평화의 고향 땅이 될 것”이라고 외쳤다. 여기서 ‘금세기’란 20세기를 뜻한다. 21세기로 접어들어 어느덧 25년이나 지났는데 참으로 뚱딴지 같은 말이 아닐 수 없다.
통일은커녕 ‘남북한은 서로 다른 나라’라는 두 국가론이 요즘 판을 치고 있지 않은가. YS의 터무니없는 허언(虛言) 뒤에는 ‘냉전 종식’의 낙관론이 있었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더니 1991년 마침내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현 러시아)마저 붕괴했다. 낙천적인 기질의 YS는 ‘북한도 곧 망해 한국 품에 안길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듯하다.
독일이 민주주의 서독과 공산주의 동독으로 분단돼 있던 1969년 서독에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사회민주당(SPD) 출신 빌리 브란트 총리는 소련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동독에 대해서도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당시 동독은 꼭 지금의 북한처럼 ‘두 국가론’을 신봉했다. 브란트는 비록 진보 성향 정치인이었으나 두 국가론까지 포용하진 않았다. 1974년 동·서독이 서로 수도에 상주대표부를 설치할 때 벌어진 논란이 이를 보여준다. 동독은 대표부 아닌 정식 대사관 개설과 대사 임명을 요구했지만, 서독이 “동독은 외국이 아니므로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동독 측에 ‘우리는 언젠가 통일을 해야 하는 사이’라는 점을 확실히 각인시킨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브란트가 통일을 낙관한 것도 아니다. 총리 퇴임 이후인 1989년 10월 브란트가 한국을 방문했다. 동독 등 동유럽 공산 국가들을 상대로 유화 정책을 펴 노벨평화상(1971)을 수상한 그에게 독일과 한국의 통일 전망을 묻는 질문이 쏟아졌다.
브란트는 “한국이 독일보다 빠를 것”이라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4대 승전국(미국·영국·소련·프랑스)의 승인이 필요한 독일 통일과 달리 남북한만 서로 합의하면 되는 한국 통일이 더 수월하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브란트의 방한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이를 두고 ‘브란트가 한반도 정세에 어두웠구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뒤집어보면 그만큼 독일 통일이 느닷없이 순식간에 닥친 일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 간 이재명 대통령이 22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와 따로 만나 양자 회담을 가졌다. 이 대통령은 “어떻게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 독일을 이뤄냈는지, 그 경험을 배워 대한민국도 그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숨겨 놓은 노하우가 있으면 꼭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메르츠 총리는 웃으며 “비밀 노하우는 없다”고 답했다. 동·서독 관계 개선에 그토록 공을 들인 브란트도 몰랐던 비결을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35세의 젊은 정치인에 불과했던 메르츠 총리가 어찌 알겠는가. 그저 ‘준비된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옛말을 명심하고 평소 통일 준비에 힘쓰는 것만이 유일한 노하우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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