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화의 그늘, 메마른 신앙
1675년 독일 루터교 목사 필립 야콥 슈페너는 『경건한 열망』을 집필하고 있었다. 30년 전쟁 후 개신교회들은 가톨릭과의 교리 논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정교한 신학 체계를 구축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要理問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등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암송하게 했다. 교회는 형식적 예배에 치중했으며 급속히 경직됐다. 루터교, 영국국교회, 개혁교회가 국교로 확립되면서 신앙은 더욱 제도화됐다. “교회는 있으되 그리스도가 없고, 성서는 있으되 영성은 메말랐다.” 슈페너가 꿈꾼 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교리가 아닌 체험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늘이 더 순수한 교회를 찾기 위한 ‘제2차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청교도의 순수한 꿈, ‘언덕 위의 도시’를 세우다
영국국교회가 확립되면서 가톨릭적 요소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현실에 청교도들은 분노를 느꼈다. 신도들은 교리문답을 암송하고 예배에 참석했지만, 그 안에는 참된 회심도, 구원의 확신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과연 선택받았는가?”
칼뱅에 따르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만 구원받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알 수 있을까? 청교도들이 찾은 답은 철저한 성화(聖化)의 삶이었다. 회심 체험으로 거듭나고, 그 증거가 경건한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구원은 단순한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영적 투쟁이었다.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묘사한 여정이 바로 그러한 삶의 모습이었다. 리처드 백스터는 교회가 참된 신자들로 이루어진 거룩한 공동체, 곧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탄 102명은 폭풍과 질병을 뚫고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그해 겨울, 절반만 살아남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불타는 열망이 그들을 이끌었다. 이어 1630년 대규모 이주민이 매사추세츠만에 도착했다. 청교도들은 ‘언덕 위의 도시’를 꿈꾸며 자기들이 살 집을 짓기 전에 먼저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박해를 받은 청교도들은 결국 영국국교회에서 분립하여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 등 새로운 교파를 형성했다. 각각의 교파가 더 높은 영적 기준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슈페너의 경건회, ‘교회 안의 작은 교회’에서 모라비아 교회로
독일에서는 혁신적인 실험이 시작됐다. 루터교 목사들은 교리 해설에만 집중했고, 신도들은 수동적으로 듣기만 했다. 슈페너가 창시한 경건회(collegia pietatis)는 기존 교회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한겨울 저녁, 프랑크푸르트의 한 가정에서 열린 경건회 모습을 상상해보자. 촛불이 흔들리는 작은 방에서 열 명 남짓이 둘러앉아 성서를 읽고 있다. 목사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서로 배우고 격려하는 공간이다. 서로 영적 고민을 나누고 기도로 돌본다. 이 모임은 형식적이기만 한 신앙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할레의 프랑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회개의 투쟁’을 강조했다. 교리를 머리로 이해하고 동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참된 회심은 온 존재를 뒤흔드는 변화이며, 죄에 대한 깊은 절망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동반되는 극적 체험이어야 했다.
진첸도르프는 경건주의를 더욱 실천적으로 발전시켰다. 박해받는 모라비아 형제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며 헤른후트 공동체를 세웠다. 그는 반(Band)과 콰이어(Choir)라는 소모임을 조직해 강력한 선교 사업을 펼쳤다. 결국 슈페너의 교회 갱신 운동에서 시작된 경건주의는 독립적인 모라비아 교회로 분립됐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구원의 확신을 찾다
영국의 존 웨슬리는 회심을 체험하기 전까지는 참된 믿음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1735년 조지아 선교를 위해 대서양을 횡단하던 중 충격적인 체험을 했다. 폭풍우가 광포하게 배를 뒤흔들어 갑판이 갈라질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비명이 터지고, 바닷물은 창문을 넘어 들이쳤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모라비아 교도들은 마치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고요했다. 그들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두 손을 모아 찬송을 불렀고, 어린아이들마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반면 웨슬리는 온몸이 떨렸다. 가슴은 죽음의 공포로 조여 왔고, 냉기가 그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순간, 깨달았다.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두려움에 떠는구나!’ ‘나는 인디언들을 개종시키려 미국으로 건너갔다. 오, 그렇다면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신앙적 회의감이 선교 사역 내내 그를 괴롭혔다.
1738년 5월 24일 저녁이었다. 런던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한 모라비아 교도 모임에서 누군가가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죄인을 용서해 주신다”는 내용이었다. 웨슬리는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지금까지 열심히 기도하고 선행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이라 믿었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이미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속회(Class Meeting)를 조직했다. “지난주에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이 모임은 참신했다. 각자의 신앙 체험을 나누고 서로의 영적 성장을 격려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신도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었다. 웨슬리는 칭의를 넘어 완전성화까지 가능하다고 외쳤다. 교회는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뤄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개혁 운동은 영국국교회의 심한 박해를 받았고, 결국 감리교회로 분립됐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진 영적 유산
17~18세기 제2차 종교개혁은 형식에서 영성으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제도에서 공동체로의 근본적 전환이었다. 구원에 대한 확신, 살아있는 영성, 성화에 대한 열망은 모두 순수한 교회를 위한 섭리였다. 이들이 꿈꾼 것은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살아있는 관계 속에서 자라는 신부 공동체였다.
이 영적 유산이 미국을 중심한 영적 대각성운동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다. 1907년 평양 대부흥과 1930~40년대 신령집단의 토양이 됐고, 마침내 1943년 독생녀 탄생의 기반을 마련했다. 서구 2천 년 기독교의 신부 영성과 한민족의 고유한 영성이 만나는 섭리적 순간이 준비되고 있었다.
양순석 역사신학자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경찰 노조](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23/128/20251123510240.jpg
)
![[특파원리포트] 대마도는 누구 땅인가](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23/128/20251123510235.jpg
)
![[이종호칼럼] 건강한 대한민국, AI가 길을 열다](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23/128/20251123510222.jpg
)
![[김정기의호모커뮤니쿠스] 입씨름은 말고 토론해야 할 때](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23/128/20251123510230.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