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00인데, 모르겠어?”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갑자기 호출당한 느낌이었다. 순간 당황했고, 그래서 아무런 대답이나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던 나른한 어느 날 오후 전화 수신기에서는 계속 친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 함께 있었던 시절 잊은 거야….”
목소리의 주인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고교 시절 3년간 함께 공부한 친구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오히려 수신기를 드는 순간부터 전화선을 타고 어떤 시간, 기억들이 마구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연유인지를 알 수 없었지만, 그때까지 누구에게 고교 시절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건, 아예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자신의 안에만 두고 있던 마음 또는 어떤 닫힌 문을 열어 보기가 두렵고 겁나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친구와 통화를 마친 소설가 신경숙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가 했던 말은 머리에 남아 계속 맴돌았다. 혹시 우리하고 함께 지냈던 그 시절을, 우리를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야…. 기어이 가슴 속으로 들어와 마음을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너는 우리하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더라….
그게 아닌데…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의 마음은 친구의 의심을 힘차게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입 밖으론 아무 소리를 내지 못했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그는 어떤 설명이나 해명도 내놓지 못했다. 친구야, 난 부끄러워하거나 그런 게 아니야….
지금 작가로서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 마침 첫 장편소설 『깊은 슬픔』을 발표한 직후로, 등단한 지 10년이 돼 작가의 삶을 되돌아볼 즈음이었다.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나 장편 『깊은 슬픔』을 쓰면서 뭔가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아쉬움도 있었고. 신경숙은 문득 자신의 내면으로 더 들어가 보고 싶었다.
“너는 우리하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더라, 우리를 부끄러워하는 건 아니야, 라는 질문에 답변을 해줘야 될 것 같았습니다. 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그때 함께 있었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 같았고, 아울러 당시 작가로서 가장 큰 고민이었던 글쓰기에 대한 질문이어야 할 것 같았지요.”
작가 신경숙이 발표 30년 만에 유신 말기 구로공단에서 일하면서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닌 여성 노동자들의 분투와 작가로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교직시킨 장편소설 『외딴방』의 개정판을 펴냈다. 작품은 친구의 전화를 받은 이후 문학잡지에 네 차례 연재한 이듬해인 1995년 처음 발표됐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11쪽)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은 작가가 된 ‘나’가 어느 날 고교 친구의 전화를 받고 “열여섯에서 스물이 되기 전까지”, 즉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에서 보고 느꼈던 삶을 반추하면서 펼쳐진다. 그리하여 구로공단 동남전기에 다니면서 산업체특별학급으로 영등포여고를 다녔던 기억과, 현재 작가로서의 글쓰기 고민이 교차하면서 잔잔하고도 거대한 공명을 일으킨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차장을 내다보았다. 멀리 공장 굴뚝들이 울뚝울뚝 솟아 있었다. 기차가 좀 천천히 달렸으면. 그곳에 불을 좀 밝혀주었으면. 창턱에 내려놓은 팔을 쳐다보았다. 가치의 진동에 팔이 이러저리 흔들렸다. 여기가 그곳이려니 생각하는 순간, 가슴속에서 백로 한 마리가 푸드득 깃질을 쳤다.”(540쪽)
신경숙은 왜 『외딴방』을 써야 했고, 30년 만에 다시 개정판을 내야 했을까. 그가 그린 외딴방은 도대체 무엇을 품고 있었던 것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가고 있을까. 갈급한 질문과 호기심을 안고 신 작가를 지난 12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외딴방』을 발표한 뒤 처음 전화를 걸어온 친구와 다시 통화했는지요.
“친구가 다시 연락을 해오지 않아서 통화하지 못했어요. 책이 나온 뒤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에 가면 그때 친구들이 오기도 하고, 친구의 딸들이 와서 엄마에게 들었다며 이야기하기도 하지요.”
―‘산업체특별학급’을 잘 모르는 독자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당시 회사에서 학교에 많이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일할 당시 회사에서 10명밖에 보내주지 않았죠. 10명을 뽑는데, 무려 700명 쯤 학교에 가겠다고 지원했고, 결국 시험을 봐서 10명을 뽑았어요. 저의 경우 공부를 잘해서 간 게 아니라, 학교를 졸업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된 게 아닌가 생각해요. 다들 저보다 서너 살, 많게는 대여섯 살 많았지요.(지금도 ‘산업체특별학교’가 있는지) 한경신 선생이 나중에 제가 소설을 발표할 때마다 편지를 보내 ‘학교는 지금 이렇게 바뀌었고, 학생들은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때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려주곤 했어요.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오셨죠. 지금은 모두 없어졌어요. 동네 자체가 가산디지털단지로 바뀌어 사라지지 않았나요.”
―당시 공장과 외딴방이 있던 구로공단은 예전의 모습을 상실했습니다.
“가끔 제가 살았던 가리봉동 근처를 가볼 때가 있는데, 지금은 알아볼 도리가 없이 완전히 변했더라고요. 작품을 쓰고 한 10여 년 동안 가보지 못했어요. 나중에 한 신문사 기자들과 갔던 기억이 있는데, 너무 달라져 당시 길을 찾지 못하겠더라고요. 이제는 소설 안에만 있는 풍경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당시에는 벌집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다들 참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그곳 외딴방에서 저와 외사촌, 큰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놀랍지만, 그땐 다들 열심히 살았어요. 아침부터 밤이 될 때까지 일하고, 밥도 해 먹고, 그곳에서 웃는 일도 많았지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끼면서 자기 삶만 꾸려가는 게 아니라 적은 월급에도 시골로 보내고 동생 학비도 대고 그랬어요. 어떻게 살았지, 라고 생각하는 건 먼 훗날 그 시절을 생각하는 것이죠. 당시엔 그런 생각 안하고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어요. 인간이란 원래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의 약 20% 정도밖에 안 하고 산다고 하더라고요. 인간은 어떤 상황이 닥치면 한 발 한 발 디디어 가면서 꿈도 꾸고 그러는 것 같아요.”
―희재 언니를 비롯해 안향숙, 미서, 미쓰 리 등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데, 특히 공을 들인 인물은 누구였나요.
“희재 언니는 당시 공단에서 일했던 많은 여성 노동자들의 어떤 상징성을 갖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삶을 헤쳐 나가지 못한 선택을 하는 쪽으로 나오지만, 안향숙이나 미서, 외사촌 등의 삶이 응축돼 있지요.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공을 많이 들였는데, 그들이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제 문장 안에서 다시 살아나 불멸화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와 아버지, 큰오빠, 셋째 오빠, 외사촌 등 가족 친지도 많이 나옵니다.
“동사무소에 다니면서 공부를 하고 동생들을 뒷바라지한 큰오빠에게도 애정이 많이 갑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30년 전쯤에는 시골 출신의 형제 많은 집에서 장남들이 이루어낸 것이 분명 있었던 것 같아요. 농촌 출신 장남들이 대도시에 나와 일궈낸 것들이 우리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저의 경우 형제 많은 시골의 넷째 여성으로 태어났는데, 큰오빠가 대도시에서 학교 교육 등을 이끌어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볼 때가 가끔 있어요. 상상이 잘 안되고, 까마득하죠. 그들 장남 역시 당시 스물둘 셋에 불과해 가장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어요.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까를 생각하면 좀 뭉클한 대목이 있지요.”
―이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어려웠거나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이었는지요.
“첫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가 생각지도 않게 크게 화제가 됐는데, 이 작품을 발표할 때에는 제 자신이 화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힘들었어요. 『외딴방』에선 제가 아니라 희재 언니를 비롯해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각자 일터에서 일하고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 같이 공부한 친구들이 잘 보이기를 바랐어요. 저를 줄이고 그들의 삶이 소설을 끌어나가기를 바랐죠.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가장 어둡고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이겠지만 가장 투명하게 어떤 식으로도 꾸미지 말자고 생각했고, 문체적으로는 세련되게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것을 끝까지 유지하는 게 힘들었지요.”
―독자로서 과거 이야기는 현재형으로, 현재 이야기는 오히려 과거형으로 쓴 점도 특이했던 것 같습니다.
“과거 이야기로 읽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심했습니다.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네, 라고 읽히지 않게 하기 위해, 과거는 현재형으로 써서 현재 속에 그 시간들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려 했죠. 글을 쓰는 지금의 시간과, 16년 전의 시간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어요. 과거는 현재형으로 써서 현재로 올라오게 하고, 지금 쓰고 있는 이 시간은 오히려 과거형으로 써서 거슬러 내려가게 해서 서로 만나게 하려 했어요. 삼풍백화점 붕괴 등 당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작품 안으로 그대로 들어오게 하고, 16년 전에 만났던 친구들도 가능한 한 더 보태지 말고 그대로 쓰자는 마음이었죠. 제 마음 속에선 1970년대 구로공단에서 살았던 많은 존재들, 저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그들을 불멸화시켜야 되겠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하는 게, 너는 우리랑 함께 했던 시절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 아니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했어요.”
―『외딴방』에 대해 노동소설이나 성장소설, 메타소설로 보는 등 여러 평가가 나오는데요.
“『외딴방』이 영어로 번역 출간된 뒤에도 질문이 나오던데, 외딴방이 노동 하나만 지칭하는 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소설로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고, 어떤 예술가 소설로도 읽히기를 바라기도 하고요. 하루 종일 과자를 싸는 노동자 친구들과의 우정이나 사랑, 노동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자존심이나 품격, 심지어 죽음까지도 같이 들어 있는 방으로 읽혔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왜 30년 만에 개정판을 내게 됐는지요. 어떤 부문을 새로 쓴 것인가요.
“저에게는 고치는 시간이 아니라 두 눈을 뜨고 첫 장부터 끝장까지 샅샅이 읽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건 저에게 무척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고치는 것은 최소한으로 아주 조금 했어요. 이를 테면, 부호를 수정한다든가, 틀린 연도를 수정한다든가. 지금은 쓸 수 없는 작품으로, 모든 작품이 탄생할 때에는 그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당시에는 절실해 썼을 텐데, 30년이 지난 눈으로 다시 봐서 이렇게 보이지 않나, 그러면 그때 그 시간은 어쩌란 말인가. 이런 질문이 남아 거의 그대로 뒀어요.”
그는 인터뷰 중간 “이 소설을 쓰고 나서 한 번도 자전적인 요소가 강한 소설이라고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였을 뿐,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며 “그런데 지금은 스스럼없이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고 웃었다.
―『외딴방』은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작품일까요.
“작가로서 10년째 되던 때에 이 작품을 쓸 수 있어서 그 다음 작품으로 자유롭게 건너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못 썼으면 과연 그다음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요. 작가로 발돋움할 때 반드시 거쳐 가야만 할 관문 같은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발표 뒤에는 거의 보지 않았다고요) 작가의 말에도 썼지만, 작품을 써놓고 오랫동안 쳐다보지 않았어요. 책을 내놓고 독자들과 이야기를 가장 적게 했던 작품이기도 하지요.”
요컨대, 장편소설 『외딴방』은 신경숙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됐고, 한국 문학에서도 “문학이라는 끝없는 길 위의 지향점이 되어준 영구결번의 명작”이라는 평을 받았다. 특히 프랑스의 비평가와 문학기자들이 선정하는 ‘리나페르쉬 상(Prix de l'inapercu)’을 수상했다. 선정 사유는 다음과 같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프루스트의 소설, 에밀 졸라 작품 속 노동자들의 서사시를 한데 엮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방대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신경숙은 놀라운 힘과 열정적 감수성으로, 그러면서도 무겁지 않은 필치로 이 모든 것을 녹여냈다. 그녀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의 탄생, 노동자들의 삶, 여성의 권리 그리고 작가 자신의 성장기에 대한 놀라운 작품을 선보였다.”
달리는 기차의 창에는 소녀의 앳된 얼굴과 함께 엄마의 얼굴도 흐릿하게 비쳐보였다. 창에 비친 엄마의 얼굴은 약간 고단해 보이고 피곤해 보였다. 온종일 들판에서 일하다가 막차를 잡아타고 딸을 큰오빠가 살고 있는 서울로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창밖은 칠흑같이 캄캄했지만 그럼에도 어떤 불온한 기운이 가득했다고, 신경숙은 기억했다.
“그날 밤은 꿈에 가득 찬 밤이었고 두려움에 가득 찬 밤이기도 했습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신경숙은 남자 형제들이 노느라고 마루에 던져놓은 책들을 한권씩 읽으며 책의 세계에 빠져든 소녀였다. 엄마는 그가 책을 읽고 있으면 심부름도 시키지 않고 오롯이 책을 읽도록 내버려 두었다. 시골에서 여섯 형제 중에 네 번째 여자 아이는 할 일이 무지하게 많았음에도. 엄마는 책을 읽으면 좋아하시는구나. 엄마를 기쁘게 하려고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책 속에는 시골에서 생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세계가 있었다. 그는 언젠가 다른 세계로 가고 싶었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도 싶었지만, 한 번도 꿈을 말하지 않았다. 꿈을 적으라고 하면 학교 선생이나 간호사 등을 적어냈을 뿐.
하지만 1978년 6월11일 밤 11시57분 정읍발 서울행 기차 속에서, 신경숙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글쓰는 사람을 생각했다. 칠흙처럼 어두웠던 기차 창밖을 보며. 저 도시로 가면, 난 글을 쓰는 사람, 작가가 될 거야. 이후 한 번도 그의 꿈이 변해 본 적은 없었다. 소설가 신경숙의 씨가 뿌려지던 순간이었다.
아울러 그날 기차 안에선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의 씨도 뿌려졌다. 서울에 가서 소설가가 되면 엄마에 대해서도 써줘야지. 그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엄마는 고단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 슬퍼 보이기도 했다. 작가가 되면 엄마한테 바치는 소설을 써야지….
국어를 가르치던 최홍이 선생이 그의 구로동 외딴방으로 가정 방문을 나왔다. 책 읽기를 좋아하던 그가 학교를 나오지 않아 제적당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최 선생은 수업 시간에 시를 읽어주기도 했고, 젊은 시절 스스로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너, 왜 학교에 안 나오지 않는 거지? 최 선생이 학생 신경숙에게 물었다. 그는 노조가 설립되면서 회사가 직장 폐쇄를 앞두게 되면서 학교를 다니기 힘든 상황이었다. 동료 편에 서게 되면 학교를 못 가게 되고, 회사가 하라는 대로 하게 되면 동료들을 배반하게 되는 고통스런….
학교에 가면 맨날 주산을 놓고, 차변 대변 하면서 부기해서 너무 재미가 없어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최 선생이 다시 물었다. 그럼 학교에 나와 뭘 하고 싶은데? 책을 읽고 싶어요. 그럼 학교에 꼭 나와서 책을 읽어라. 대신 학교를 너무 오래 결석해 형식적으로라도 반성문은 써와야 해.
1979년 영등포여고의 ‘산업체특별학급’ 1학년생 신경숙은 평소 일기도 쓰고 필사도 하던 노트 뒷부분에 반성문을 써서 학교에 가서 제출했다. 일주일 후쯤, 최 선생은 교무실로 오라고 했다. 최 선생은 반성문이 담긴 노트를 돌려주는 한편 잡지 『실천문학』과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주면서 말했다. 너는 소설가가 되어보는 게 어떻겠니. 막연하게 글 쓰는 사람에서 소설가라는 구체적인 이름이 들어온 순간이었다.
“반성문을 읽은 최 선생님이 너는 소설가가 되어보는 게 어떻겠니, 라고 말씀 하셔서 글 쓰는 사람에서 소설가가 되어야겠다, 로 생각해서인지, 소설을 쓰고 있을 때면 제 삶에 대한 반성문을 쓰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웃음).”
‘스테레오과 A라인 1번’인 그는 돌아가지 않는 사무실 컨베이어벨트 위에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노트에 필사하기 시작했다. 큰오빠의 도움과 최 선생의 조언 속에 그는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에 지원했다. 학력고사 성적보다 중요했던 서울예대 문창과의 실기 제목은 ‘꿈’이었다.
“서울예대 문창과는 글쓰기 비중이 높은 반면 학력고사 비중은 낮아서 학력고사를 잘 보지 못해도 실기를 잘 보면 합격할 수 있었어요. 그때 실기 시험의 제목도 ‘꿈’이었어요. 잊어버리지도 않네요. 전 산문을 썼지요.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곳에 가니까 제 수험번호 154번이 적혀 있더라고요.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출판사에 취직해 낮에는 일하고 사무실에서 퇴근하면 『이희승 국어사전』을 들고 집 근처 독서실에 가서 글쓰기를 이어갔다. 하루에 원고지 한 장을 쓰기도 하고 세 장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독서실에서 단편 소설 「겨울 우화」를 완성해 신춘문예에 투고할 수 있었다.
1963년 정읍에서 태어난 신경숙은 스물두 살 되던 해인 1985년 중편소설 「겨울 우화」로 문예중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이후 장편소설 『깊은 슬픔』,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아버지에게 갔었어』 등을 발표했고, 연작소설 『작별 곁에서』, 소설집 『겨울 우화』, 『풍금이 있던 자리』, 『오래전 집을 떠날 때』, 『딸기밭』, 『종소리』, 『모르는 여인들』 등을 출간했다.
그는 1993년 출간된 첫 소설집 『풍금이 있던 자리』로 평단과 독자들에게 큰 호평을 받으며 일약 스타 작가로 도약했다. 그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많은 독자들이 책을 읽어주셨다”며 “개인적으로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작업실에서 소설만 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주셨다.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기반이 됐다”고 감사해 했다.
특히 2008년 발표된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미국을 비롯해 41개국에 번역 출간되며 큰 화제를 낳기도 했다.
“오래 전 기차 안에서 제 자신과 한 약속인데,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엄마라는 존재가 그런 존재였던 것 같아요. 까도까도 양파 껍질 같고. 어떻게 접근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소설로는 쓰고 싶지 않았고, 뭔가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새롭게 읽히게 하는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엄마로서의 삶을 다 산 사람, 지금 엄마로 살고 있는 사람, 앞으로 엄마가 될 사람들이 함께 읽게 되는 지점 같은 것도 만들고 싶었고요.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 첫 문장을 쓰고 나니까 뒷이야기는 저절로 써졌어요.”
그는 “작품을 많은 독자들이 읽어줌과 동시에, 해외로 번역이 돼 저를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다 준 것 같다”고 기억했다. 『엄마를 부탁해』와 『외딴방』을 비롯한 그의 많은 작품들이 해외에 번역 출간되고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만해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 수상했다. 특히 『외딴방』은 프랑스의 비평가와 문학기자 들이 선정하는 리나페르쉬 상을, 『엄마를 부탁해』는 ‘맨 아시아 문학상(Man Asian Literary Prize)’를 각각 수상했다.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법이나 원칙은 무엇인지요.
“최근 집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 문학잡지 『세계의 문학』 어딘가에 제가 짧게 썼던 글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아주 오래 전에 썼던 글인데, 거기에 이런 말을 써놨더라고요. 보편적인 이야기라도, 제가 쓰면 다르게 새롭게 읽히는 소설을 쓰겠다는 포부를 턱 하니 써놨더라고요. 한 문장도 버릴 게 없는 작품을 쓰겠다고도 했더군요. 읽는데 얼굴이 붉어졌어요. 그래도 내내 읽는 사람은 어떻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제 방식대로 계속 실험을 했습니다. 형식으로도 해보고, 문체로도 하고, 방법적으로도. 똑같은 이야기를 써도, 새롭게 읽히려면 나만의 문체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했고요. 인생에서 빛나는 사람들 편이 아닌 슬픔에 빠진 사람들 편에 서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들을 잊지 않게 하는 길은 이야기보다 문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문체를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가 된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의 비전이나 포부이기도 하겠군요.
“또 제 글을 읽었을 때 누군가 그 글로부터 내가 쓴 글로부터 상처를 받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거창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인간의 삶 중에서 다른 어떤 숨을 좀 쉬게 해 주는 것을 발견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쓰는 것 같아요. 조금 넓어진다고 할까요. 좀 다른 삶을 엿본 것 같은, 좋은 뜻으로 공감을 하게 되는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는 오전 3시에서 4시 사이에 일어난다. 예전에는 알람을 맞춰 놨지만, 지금은 몸이 알아서 일어나진다. 1층 서재로 내려간 뒤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시고, 요가의 호흡 몇 가지를 한다. 이어서 책을 읽기도 하고, 작품도 쓰기도. 최근에는 연재소설을 준비 중이다.
―글이나 소설을 쓸 때 루틴 같은 게 있는지요.
“특별한 루틴 같은 것은 없지만, 청소를 열심히 하는 것 같아요. 어떤 작품으로 들어가기 전에 뭔가 계속 안 하던 일을 해요. 서랍 정리를 비롯해 청소도 하고. 어쩌면 글쓰기를 최대한 미루기 위한 연막술인지도 몰라요(웃음). 작품을 쓰는 동안에는 어질러져 눈으로 볼 수가 없죠. 손도 많이 씻는 것 같고요.”
오전 8시까지 서재에 머무르다가 9시쯤 요가원에 가서 요가를 한다. 집으로 돌아와선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오후에도 좀 여유 있게 보낸다. 책을 읽거나, 약속에 나가거나, 약속이 없으면 잠깐 낮잠도. 최근에는 산책도 하고, 근처 산에 오르기도 한다. 일찍 저녁을 먹고 쉬다가 일찍 잠자리로. 그리하여 다시 하루의 중심 새벽으로, 새벽 글쓰기로. 그곳에서 신경숙은 ‘그해 여름’을 만나고,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열 손가락을 움직여 끊임없이 물질을 만들어내야 했던 친구’들의 손을 붙잡기도 하며, 옥상 위로 올라가선 희재 언니도….
“새벽. 하늘의 별들이 하나씩 하나씩 사위고 있다. 사위는 별빛 아래, 옥상 난간에, 누군가 금방 날아갈 듯이 앉아 있다. 희재 언니다. 그녀가 새처럼 옥상 난간에 앉아 복숭아나무나 사과나무 대신 울뚝울뚝한 공장 굴뚝 사이로 날이 밝아오는 걸 보고 있다. 기름냄새 사이로도 새벽빛은 푸르다. 새벽 앞에선 세상의 모든 것이 부드럽고 찬란한 새눈 냄새를 풍긴다. 공장의 굴뚝조차도.”(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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