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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만만한 아버지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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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1-20 23:01:28 수정 : 2025-11-20 23: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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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치고 배낭여행 떠난 아이
끝 안보이던 입시 압박의 탈출
아버지 역할 늘 두려움이 동반
상처·결핍 해결 결국 자식의 몫

올해 둘째 아이가 수능시험을 치렀다. 아이는 학교 밖 청소년으로 지내며 수험생활을 했다. 시험이 끝나고 이틀 만에 아이는 해외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고 일찌감치 준비한 여행이었다. 비행기표를 예매해 두고 그 힘으로 마지막 수험생활을 버티는 듯했다. 정작 아이가 훌쩍 떠나고 나자, 걱정이 밀려왔다. 아이에게는 혼자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미처 마음 준비를 못 한 사람은 나 자신인 듯싶었다. 한 사흘은 아이가 간단한 문자로 소식을 전해 왔다. 음식이나 숙소 사진이었다. 아이에게서 소식이 늘 부족한 듯하여 마음이 쓰였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아이가 보이스톡으로 전화를 해 왔다. 호스텔의 공용 객실에서 잤는데 밤새 추웠다고 한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싶어 숙소 근처에서 편의점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발바닥과 종아리에 파스를 붙였다고도 했다. “외롭지 않니?” 하고 나는 짐짓 태연하게 물었다. 아이가 잠시 말이 없더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고 대답했다. 이국의 낯선 거리에서 코끝이 시큰해 서 있는 열여덟 살 여행자가 떠올랐다.

전성태 소설가 국립순천대 교수

가슴은 아팠지만 여행의 본질이 그러하므로 나는 돌아오라거나 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아마 아이는 여행 그 자체보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입시의 압박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허술한 여행 가방처럼 아이에게는 공항 바깥으로 놓인 지도 따위는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아이는 따뜻한 음식으로 몸을 데우고 나면 진정한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 외로움을 못 잊어 다시 여행 가방을 꾸리는 여행자가 되겠지.

나는 아비 역할에 늘 두려움을 갖고 살아온 듯싶다. 아버지가 되었을 때는 선친으로부터 아비 역할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이 있었다. 그러니까 내 아버지 같은 아비가 되면 어떡하나 하고 겁이 났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었을 때는 어떤 아비가 되는 게 현명한지 나름대로 다짐 같은 답을 마련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만만한 아버지가 되었으면 했다. 허술하고 비합리적인 데다가 모르는 게 많아 외려 자기들이 아비를 추월했다고 여겼으면 했다. 그러면 적어도 친구 같은 아버지는 되겠거니 했다.

어디까지나 내 경험치에서 얻은 다짐이었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키가 엇비슷해졌다. 아버지에게 시계 보는 법과 휘파람 부는 법을 배웠지만 더는 아버지에게 방정식 푸는 법을 물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객지에서 자취방을 어떻게 얻고 대학은 어떻게 진학할지 자문을 구할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배울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따로 있다는 걸 모르던 때였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만만해 보였던 건 아니다. 아버지는 지나치게 가부장적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여전하였지만, 한편에서는 이제 아버지를 내가 봐줘야 한다는 연민도 싹텄다. 내가 만만한 아버지가 되고자 했던 건 권위의식마저 버린 아버지상이었다.

그만큼 외투 같은 권위의식을 벗기 어려웠다. 부지불식간에 솟구치는 내 가부장성은 자기혐오를 불러일으켰다. 아버지를 반면교사로 삼았으니 아버지를 닮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부모는 자식의 몫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생의 상처나 결핍이 가진 양면성 말이다. 부모의 인생이 자식에게 어떤 상처나 결핍을 주었든 그 실타래를 어떻게 풀 것인지는 자식의 몫이다. 어떻게 살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상처이자 결핍이다. 다만 아이들이 나보다 근사한 아버지가 되었으면 싶고, 나는 실패의 경험담을 증언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둘째는 이제 성인의 문턱에 서 있다. 아이가 아버지를 추월했다고 생각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만만한 아버지는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비로서 새로운 시간에 당도한 걸 느낀다. 그 시간은 좀 만만했으면 싶다.

 

전성태 소설가 국립순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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