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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를 듣는 시대 [이상권의 카덴자]

입력 : 2025-11-22 15:00:00 수정 : 2025-11-22 14:0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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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공연장 앞 로비를 서성이다 보면 이런 장면을 자주 본다. 티켓을 꺼내 오케스트라 로고가 잘 보이도록 각도를 맞추거나, 공연장 로고가 빼곡히 찍힌 포토월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다. 그 순간 기억되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이름이다. 큼지막한 오케스트라 로고와 함께 ‘내가 거기 있었다’는 증명. 어쩌면 우리는 음악이 아니라 브랜드를 듣는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흔히 세계 3대로 손꼽히는 오케스트라가 11월에 잇따라 서울을 찾았다. 유럽 웬만한 도시에서도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로열 콘세르트헤바우를 한 달 남짓한 간격으로 만나는 일은 흔치 않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들고 온 프로그램이다.

 

키릴 페트렌코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이 지난 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를 마친 후 갈채를 받고 있다. 이상권 제공

로열 콘세르트헤바우는 브람스와 버르토크 작품과 함께 말러 교향곡 5번을 내세웠다. 이날 객석에서 지휘자 해석에 호불호는 있었으나, 오케스트라가 한 세기에 걸쳐 가꿔 온 말러 사운드의 헤리티지를 느낄 수 있었다. 반면 베를린 필하모닉은 바그너와 슈만, 브람스 곁에 야나체크·버르토크·스트라빈스키를 나란히 두어 독일 낭만주의에서 20세기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자신들만의 계보를 성공적으로 무대 위에서 증명했다.

세계적인 악단의 내한은 언제나 국내 오케스트라에 거울이 된다. 단순히 연주력의 격차를 확인하며 ‘얼마나 더 잘해야 하는가’를 가늠하게 할 뿐 아니라 그 너머를 보게 한다. 그 차이가 곧 브랜드의 차이다.

이들 악단이 구축한 브랜드는 마케팅에 국한하지 않는다. 어떤 작곡가를 중심에 둘 것인가, 어떤 지휘자와 장기적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어떤 작품을 반복해서 연주하며 청중과 공유된 기억을 쌓을 것인가에 대한 일관된 결단이 수십년간 누적된 결과물이다. 로열 콘세르트헤바우가 말러를, 베를린 필하모닉이 20세기 레퍼토리를 자신의 전매특허처럼 연주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멩엘베르흐와 말러가 직접 교류하던 시절부터 축적된 해석의 전통, 카라얀 시대를 거쳐 래틀과 페트렌코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갱신되어 온 사운드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국내 오케스트라들이 베를린 필이나 빈 필처럼 연주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만의 레퍼토리 정체성을 구축하는 일이다. 지난 10월 방문한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이 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들은 드보르자크와 스메타나, 야나체크라는 자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한 세기가 넘도록 반복해서 연주하며 세계 어디서도 흉내 낼 수 없는 고유한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교를 자랑하는 악단은 아니지만, 드보르자크 교향곡 8번이나 스메타나 ‘나의 조국’을 연주할 때만큼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지닌다.

 

이상권 음악평론가

결국 ‘브랜드를 듣는 시대’라는 말은 피상적인 소비의 시대라는 비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청중이 음악을 둘러싼 서사와 역사, 정체성에 귀 기울이는 시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름값을 앞세우는 세계적 악단의 방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메시지는, 그들이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다.

우리가 앞으로 쌓아야 할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소리가 되고, 그 소리가 모여 언젠가 서울만의 전통과 미학이 된다. 그때가 되면 로비 포토월 앞에서 찍히는 사진 속 이름보다 공연장 안에서 울려 퍼지는 우리만의 고유한 소리가 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상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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