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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꿈의 키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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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30 23:26:34 수정 : 2025-10-30 23: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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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쩍 떠난 여행지의 ‘부엌’에서
오래 전의 ‘따뜻한 단편’ 떠올라
홀로 된 이에 손내미는 이웃들
희망 담긴 성장 이야기 여운 줘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키친’에 수록, 김난주 옮김, 민음사)

계획에 없었다가 후다닥 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중간고사 기간이었고, 어딘가에서 조용히 며칠 지내다 오지 않으면 남은 올해를 잘 보낼 자신이 없어져서. 여행지의 숙소 문을 열자 아일랜드식 부엌이 먼저 보였다. 선반에 어릴 적 우리 집 부엌에도 있었던 꽃무늬 냄비 세트와 삼 단짜리 찬합, 유리잔들, 접시들이 나란 나란히 놓였고 면포들과 행주가 걸린. 마치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한 식기와 요리도구들. 우선 냉장고에 쌀을 넣고 밥통을 깨끗하게 닦아놓자 체류할 모든 준비가 완성된 기분이 들었다.

조경란 소설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머릿속에서 반짝 떠오른 것은 그때가 아니라 긴긴 산책을 마치고 동네 골목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불 켜진 집들에서 음식 냄새가 풍기고 사람들이 모여 앉은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저녁밥을 먹는 시간. 눈물을 흘리며 골목을 걷다가 이와 유사한 장면에서 저기 “주방이다”라고 깨달은 시점인물이 머물던 집으로 달려가 요리를 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이 선명히 기억났다.

유일한 가족이던 할머니마저 잃은 스무 살의 나, 미카게는 장례식을 치른 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집의 낯선 정적과 고요, 혼자라는 두려움 때문에. 어느 날부터 부엌에 요를 깔고 자기 시작했다. “위∼잉, 냉장고 소리가 내 고독한 사고를 지켜”주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미카게는 원래 부엌을 가장 좋아했고 “집과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취향”을 부엌으로 판단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건 부모를 잃은 어린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의 영향이기도 했으리라. 게다가 할머니의 부엌에는 언제나 꽃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혼자 살기에 그 집은 비싸고 넓어서 다른 방을 찾아야만 했다.

할머니가 단골로 다니던 꽃집 청년 다나베가 찾아와 어머니와 사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 집에 가서도 미카게는 부엌 먼저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오랜 세월 길들여진 도구들, 얌전하게 포개어진 식기류와 작은 냉장고. 소박하지만 멋진 부엌이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다나베는 말했다. 할머니가 평소에 손녀 걱정을 많이 했다고. 지금은 혼란스럽고 힘들 테니 당분간은 여기서 같이 지내면 어떻겠냐고. 돌아가셨어도 할머니는 이 배려심 깊은 청년을 선물로 남겨준 걸까. 그 집의 부엌을 믿게 되었듯, 미카게는 거기 머물기 시작한다.

생각해 보니 이 단편을 왜 이렇게 오랜만에 떠올렸는지 알 듯하다. ‘키친’과 요시모토 바나나 열풍이 불던 이십 오륙 년 전, 나는 한창 젊은 작가로 빠듯한 생활을 꾸리며 지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어디 있어,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에게 자기 집에서 지내자고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 말이야, 하며 이 이야기를 믿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시절 내 마음의 차디찬 냉소와 나에겐 오지 않고 베풀지도 못할 듯한 선의를 인정하듯. 그러나 어쩌면 그 유사한 선의와 호의를 기다렸고 나눌 수 있는 어른이 되길 원했을까. 그 후로 긴 시간 소설을 읽고 쓰면서.

‘후기’에 요시모토 바나나는 말했다. 옛날부터 오직 한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희망과 가능성이 담긴 극복과 성장의 이야기라고. 요시모토 바나나는 소설을 시작할 때부터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있었나 보다. 이 단편의 유일한 어른인 다나베의 어머니는 집을 떠날 마음을 먹는 미카게에게 인생이란 한 번 절망해 봐야 알고, “정말 버릴 수 없는 게 뭔지를” 아는 어른이 될 거라고 조언한다.

“꿈의 키친”. 미카게는 떠올린다. 앞으로 그런 키친을 몇 군데나 지니게 될지 모른다고. 여행지에서, 혼자서, 여럿이서, 자신이 사는 모든 장소에서.

부엌이 아니어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 거기서 보낸 시간과 만난 사람,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을 새삼 떠올려보는 시간만으로도 이 소설은 충분하리라. 나 역시 “믿을 수 있는 부엌”을 떠나와 부엌이 없는 작업실로 돌아왔고 앞으로 만나게 될 꿈의 키친을 잠시 떠올려본다. 이 소설이 가져다준 온기 속에서.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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