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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운명과도 같았던 스승, 문선명-홍일식 선생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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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28 18:16:08 수정 : 2025-10-28 18: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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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홍일식 고대총장 추모문집에서
“문화영토는 천하에서 가장 넓은 땅이며 모든 민족과 국가를 포용하고도 모자라지 않은 영토이며, 배타적으로 경쟁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가치의 영토이다.”(홍일식 총장 어록 ‘문화영토론’에서)
손대오 박사(전 세계일보 회장)

사람의 일생에 인연으로 맺어지는 일이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내가 고려대학교와 홍일식 선생님을 만나고 사제(師弟)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운명적인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적이 많았습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곁에 안 계시니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떠나신 지 벌써 2년이 되고 보니 마음속의 빈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어 황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내가 홍일식 선생님의 존함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재학 때였습니다. 당시 나는 부산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존함을 알게 된 사연인 적은 이렇습니다. 1963년 고3, 2학기 시절 모두가 대입시험 준비하기에 정신없이 바쁜 시절 나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 행운아(?)였습니다. 나는 그때 이미 고려대학교 안암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사가 넉넉지 못한 집안의 학생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유학을 하기란 쉽지 않은 시절, 나는 담임선생님의 안내와 인도로 고려대학교의 안암장학생 선발에 응시하여 일찌감치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게 된 것입니다. 4년간 풀 스칼라십(Full Scholarship)을 베풀어준 모교에 진심으로 감사를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당연구’를 집필한 대학생 홍일식

 

그러던 어느 날 학교 도서관 서가에서 ‘육당연구’(1959, 저자 홍일식, 일신사)라는 책을 발견하였고, 그책은 나에게 매우 흥미로운 연구서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저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때 처음으로 홍일식 선생님의 존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분임에도 이런 흥미로운 책을 쓰시다니, 참으로 대단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당시의 유진오 총장께서는 저를 총장실로 부르셔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시다가 안암장학생으로서  수석합격자가 법학과나 경영학과를 안 가고 왜 국어국문학과에 입학을 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이전의 안암장학생들이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것이 몹시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수한 학생들이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분야이기에 그렇게 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총장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구자균 선생님께서 저를 선생의 댁(학교앞 제기동)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신입생을 댁으로 데려가시는 일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아마도 안암장학생으로서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것 때문에 학과교수님들께서 더 많은 관심을 가진 덕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날 구자균 선생님 댁에서 홍일식 선생님을 처음으로 대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홍일식 선생님은 그때 대학원에 적을 두시고 모교인 양정고등학교 교사로 계시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구자균 선생님께서 저를 홍일식 선생님에게 소개하시면서 “손 군을 잘 지도하라”고 당부를 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홍일식 선생님은 구자균 선생님의 소개로 육당 최남선을 뵙게 되어 학부 학생으로 육당선생을 사사(師事)하여 후일 ‘육당연구’를 출간하실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홍일식 선생님께 사사받게 된 것이 무척이나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대학 일학년이 끝나갈 무렵인 1964년 12월, 구자균 선생님이 작고하셨습니다. 그 후 수년간 홍일식 선생님과는 인연의 끈이 잘 닿지 않는 나날이 나에게 벌어졌고 선생님도 여러 일과와 과업을 수행하시느라 나와의 만남이 쉽지 않았지만 뒤로는 늘 저의 행보를 지켜보고 계심을 후에야 알았습니다. 

 

◆민족문화연구소 중흥의 주역

 

선생님과의 만남은 1972년 선생님이 모교 국문학과의 전임으로 발령받으신 후에 다시 이어졌습니다. 나는 그사이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친 상태였지만, 나의 인생행로가 세칭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선생의 제자로 투신하게 되어 학문의 길에 대한 나의 열정이 예전 같지 않았던 때였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학문적 열심이 문선명 선생이 제시하는 ‘통일원리’의 비전에 대한 종교적 열정에 자리를 내주고 난 뒤였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님과 다시 만나게 되면서 마음을 다잡게 되었습니다. 비록 좀 늦었지만 나의 종교적 열정과 학문적 관심을 동시에 다룰 수 있었던 “한국 고전소설의 의식지향 연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은 선생님도 모교에 전임 발령을 받으시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많은 기간이셨습니다. 민족문화연구소의 총간사로 시무하면서 조지훈 선생님이 작고하시자 그 유지를 받들어 ‘한국문화사대계’ 전7권 11책을 완간(1972년)하셨습니다. 이어서 1972년에 모교 전임 발령을 받은 후 1978년에 민연 소장을 맡아 ‘한국현대문화사대계’ 전5권을 발간(1980년)하고, ‘한국민속대관’ 전6권을 완간(1982년)하는 등 선생님 생애 중 가장 폭넓고 바쁜 활동을 하셨던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러한 추진력과 함께 혜안을 가진 리더이셨습니다.  민연 소장에 취임하시면서 “미래는 언제나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소신으로, ‘중한대사전’ 편찬을 위한 '중국어사전편찬실'과 문화영토 연구를 위한 ‘문화영토연구실’을 출범시키셨던 것입니다. 내가 박사과정 지도를 받던 기간도 이 기간이라 선생님을 자주 뵙고 선생님이 열정적으로 추진하시는 프로젝트를 지켜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세계 최대 중한대사전 편찬

 

선생님을 추모하는 이 글에서 담아야 할 내용들이 많지만, 선생님이 문선명 총재와 저를 거명하면서 선생님의 회고록  ‘오직 고려대학교’에도 자세히 언급하신 ‘중한대사전’ 편찬 지원 건에 대한 내용이야말로 당사자인 제가 증언을 올리는 것이 서거하신 두 분의 크신 스승님에 대한 저의 마땅한 책무가 아닌가 합니다. 회고록  ‘오직 고려대학교’ 181쪽과 218쪽에 선생님이 남겨놓으신 기록을 옮깁니다.

 

“이 무렵 특히 오랫동안 온갖 고초 속에 중국어사전(대·중·소 사전: ‘중한대사전’ 30만 어휘, ‘중한사전’ 18만 어휘, ‘현대중한사전’ 10만 어휘)을 편찬하느라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크게 협조를 해준 통일교 재단의 문선명(文鮮明) 총재의 용단은 참으로 고마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계 최대인 30만 단어 이상의 ‘중한대사전’ 편찬 자체가 엄청난 기획사업인 데다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어야만 했다. 그런데 문 총재가 민연이 발간한 ‘한국민속대관’ 1천 질을 현금 2억 원으로 구입하여 전 세계에 보급함으로써 한국문화를 널리 알림과 동시에 우리 민연에는 ‘중한대사전’ 편찬에 꼭 필요했던 재원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181쪽)

 

“내가 박사과정을 지도했던 손대오(孫大旿) 교우는 일찍이 유진오 총장시절, 초기 안암장학생 선발시험에 수석 합격한 수재로서 국문학과를 지원한 학생이었다. 이미 학부 시절에 통일교회 창시자 문선명 교주의 손꼽히는 제자가 되었다. 그 손대오 교우에게 내가 ‘자네 그렇게 통일교 자랑만 하지 말고, 이 ‘한국민속대관’ 영문 요약문도 수록되어 있으니 그 쪽 젊은이들, 특히 뉴욕 거리에서 꽃과 양초를 판다는 미국 대학생들을 통해 이 책을 팔아 줄 수 없겠나?’라고 했더니 ‘우리 선생님을 한번 직접 만나 보시지요. 아버지 허락이 나면 몇 천 질도 문제 없습니다’ 하는 것이었다.”(218쪽)

 

218쪽과 관련되는 얘기입니다만, 1980년 12월 선생님과 나는 ‘한국민속대관’ 보급을 위해 그때까지 발간된 1, 2권을 둘러메고 미국의 주요도시 재미 교포단체 순방을 떠났습니다. 순방을 떠나기 수일 전에 민연을 방문하신 김상협 총장께서 저에게 미국 순방에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홍소장을 잘 도와 성공적인 순방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씀했었지요. 

 

재미교포를 만나는 일정은 동부의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시카고, 뉴욕으로 이어졌습니다. 현지에 도착하고 난 뒤에 안 일이지만 우리 순회 일정에  맞추어 미주 한국일보가 선생님이 쓰신 ‘옛 新羅坊과 美洲韓人’(문화영토시대의 민족문화, 478~489쪽, 육문사,1987.11)이란 제하의 기고문을 6회에 걸쳐 연재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주도면밀함에 적이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뉴욕에서 저의 주선으로 문 총재님을 만나는 일정이 정해졌을 때, 문 총재님께 드릴 민속대관 1, 2권에 ‘文波萬里’라는 제자(題字)를 쓰시고 준비해 오신 마고자와 진곤색 두루마기를 갖춰 입고 나오셨습니다. 이 부분도 회고록 219쪽에 소상히 기록해 두셨습니다. 한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세계적인 종교를 창시한 분, 제가 생애를 바쳐 모셔온 문선명 선생님과의 만남에 격조있는 격식을 차리시는 것에 저는 감사했습니다. 그날의 만남이 큰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날의 만남과 그 결과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선생님의 회고록 ‘오직 고려대학교’에 ‘문선명 선생,  ‘한국민속대관’ 1천질 구입- ‘중한대사전’ 제작비 지원 의미로’라는 항목으로 자세히 기록해 두셨습니다. 이 건을 가지고 세상의 호사가들이 별 소문을 내면서 선생님을 비방하던 자들에게 당당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김상협 총장님도 저에게 이 일을 잘 도와 달라고 당부를 하셨고 문총재와 홍소장님의 만남을 주선한 사람으로서 선생님의 이 회고록 기록을 보면서 다시 한번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신 것에 감사를 올립니다.

 

◆문화영토시대와 한국어

 

그 후 1986년 3월, 선생님이 민연에 개설한 한국어·문화연수부를 출범할 때, 제가 문총재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본의 통일교인 청년들 4천 명에게 한국어를 연수하도록 주선하였습니다. 문총재님의 가르침을 받는 세계 각국의 신도들은 종주국 한국의 언어와 문화를 모두가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 주창하신 ‘문화영토론’의 현장을 저는 세계 무대의 현장에서 실천하던 사람으로서 한국어를 외국인들에게 보급하는 일은 나의 일처럼 보람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 교실이 부족하여 고려대학교에서 수업을 하지 못하고 정릉에 있는 고려중·고교의 교실을 빌려 수업을 했던 일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드리고 싶은 여러 사연들이 많지만 이 정도로 마감하는 게 순리에 맞다고 느껴집니다. 

 

운명적으로 만난 두 분의 큰 스승, 문화영토론을 주창하신 고려대학교 홍일식 총장님! 한국을 종주국으로 하는 세계 통일교회를 창시하신 문선명 총재님! 나는 이 두 분 큰 스승의 가르침과 인도로 나의 생애를 보람있게 보내게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한 분은 학문적 스승으로, 다른 한 분은 종교-신앙적 스승으로 모시고 그 두 분간의 상호교류와 이해가 문화영토라는 키워드로 확장 심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제 삶이 보람과 충만으로 감사하게 되었음을 선생님께 고백하게 됩니다. 

 

이제 이글을 맺는말로 선생님께서 2022년 6월에 펴내신 ‘대한민국 이야기’에 나와 있는 결론 부분을 인용함으로써 운명처럼 만났던 선생님을 여의고 외롭게 남은 남은 제자의 추모의 정을 올려드리고 싶습니다.

◆문선명 선생의 통일사상, 세계적 보편가치

 

“~(前略) 우리 역사 속에서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날 삼국 중 가장 후진국이었던 신라가 어떻게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강대한 대륙국가였던 고구려와 풍요롭고 찬란했던 백제가 당시 보편주의로서의 불교 그것에만 안주하고 있을 때, 신라만은 그 불교사상에다가 우리의 토속적인 현묘지도(玄妙之道)와 국선(國仙), 풍류지도(風流之道)를 접목시켜 한 단계 높은 사상과 이념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사상을 대승불교(大乘佛敎)로, 호국불교(護國佛敎)로, 다시 세속오계(世俗五戒)로 발전시켜 신라 백성의 정신적 지주가 되게 하였고, 이로써 교육받고 훈련된 청소년들의 역량이 화랑도 정신으로 승화 확산되어 마침내 통일성업을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보는 바로는 오늘날 이 땅에 기독교 문명이 들어온지 200여 년, 모든 서방세계가 기독교사상 그것에만 안주하고 있을 때, 이 보편적 가치에 만족하지 않고 동양의 사상과 한국적 가치를 접목시켜 천도에 입각한 새로운 보편적 사상 가치를 창조해낸 것이 바로 문선명 선생의 통일 사상이 아닌가 감히 추론해 봅니다.

 

21세기 우리 한국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도덕적 정당성 위에 서서 문화대국, 사상대국, 이념대국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선명 선생의 통일사상이 우리 문화와 인류역사에 과연 어떤 역할을 할 것이며, 얼마만한 영향을 발휘할 것인지는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인류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천상에 계실 두 분 선생님! 부디 평강하시옵고 땅 위에 남아 갈길 몰라 헤매며 서로가 갈등하며 자해소동을 벌이는 인류에게 넉넉한 문화의 힘으로 평화와 번창의 밝은 길을 비추어 주는 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곡히 비옵니다.

 

문선명 총재의 자서전과 3대 사상서

 

-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김영사 출판)

- ‘통일원리 강론’(가정연합)

- ‘공산주의의 종언’(승공이론서, 통일사상연구원 출간)

- ‘통일사상 요강’(철학, 인간관 세계관 역사관 사상이론서, 통일사상연구원 출간)

 

홍일식 총장의 주요 저서들

 

- 홍일식 총장 자서전 ‘오직 고려대학교’(고려대출판문화원)

- ‘나의 조국 대한민국’(동서문화사)

- ‘문화대국으로 가는 길’(범우사)

- ‘문화영토시대의 민족문화’(육문사)

- ‘대한민국 이야기’(청파랑)

- 추모문집 ‘문화대국을 향한 집념의 한 평생-홍일식 박사를 생각한다’(문화영토연구원)

 

손대오 박사(전 세계일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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