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정부 시절인 2024년 봄 ‘국민 과일’ 사과 값이 폭등했다. 1년 전과 비교해 가격이 무려 71%나 치솟았으니, ‘애플’(사과)과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조합한 ‘애플레이션’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혹자는 ‘외국에서 좀 들여오면 안 되나’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오렌지, 포도, 망고 등 30여종의 과일을 수입하고 있으나 사과는 대상이 아니다. 미국은 1993년부터 한국에 자국산 사과 수입 허용을 요청했다. 하지만 우리의 식물 위생·검역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30년 넘게 승인을 얻지 못했고 있다. 이는 국내 사과 농가 보호를 위해 수입을 최대한 미루려 한 정부의 조치와도 무관치 않다.

1990년대 초반 미국으로부터 “우리 사과를 수입하라”는 요구를 받은 받은 나라가 한국뿐인 것은 아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훨씬 더 거센 압력에 직면했다. 어찌 보면 미국 입장에서 한국은 ‘곁가지’에 불과하고 진짜 목표는 한국보다 훨씬 큰 일본 시장을 뚫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본을 겨냥한 미국의 공세가 얼마나 집요했는지 1993년 6월 미·일 양국 언론에는 ‘사과 전쟁’이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미국은 일부러 자국 내 최대·최고의 사과 생산지인 워싱턴주(州)에 협상장을 마련하고 그리로 일본 대표를 불렀다. 일본 측은 “미국 사과나무의 소독·방제 실태가 일본 기준과 맞지 않는다”며 완강히 거부했다. 이에 미국은 무역 보복 가능성까지 내비치는 등 강경 분위기로 치달았다.

1994년 6월 일본 정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자민당 절대 우위 체제가 무너진 가운데 우파 자민당과 좌파 사회당이 손을 잡고 연립정부를 출범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 사회당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위원장이 총리를 맡아 연정을 이끌었다. 무라야마 내각은 사과 등 미국산 농산물 수입 개방 문제에서 전보다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 무라야마 내각 임기 중인 199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맞는 것도 중요한 변수였다. 미국을 침략했다가 결국 패전국, 전범국으로 전쟁을 마친 일본으로선 미국에 ‘과거사 반성’의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1945년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의 결정은 옳았다”고 말하는 등 일본을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1994년 8월 미·일 간에 미국산 사과의 일본 수출을 둘러싼 협상이 타결됐다. 이듬해인 1995년부터 일본의 미국산 사과 수입이 본격화했다. 17일 무라야마 전 총리가 101세를 일기로 별세한 뒤 미국 언론의 부고 기사에 첨부된 사진에 눈길이 쏠린다. 1995년 1월 미국을 방문한 무라야마 총리가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사과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받는 장면이었다. 이 사과는 워싱턴주에서 생산된 것으로 지난 수년간 미국이 그토록 일본에 팔고 싶어했던 바로 그 품종이다. 일본의 수입 개방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클린턴이 건넨 사과 선물을 미 언론은 ‘사과 외교’(apple diplomacy)라고 불렀다. 국익에 대한 미국의 집착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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