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흐름에 올라탄 듯한 만연체
공항서 신타그마까지 긴 여정
분주한 상황 실제처럼 느껴져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서’(‘서왕모의 강림’에 수록, 노승영 옮김, 알마)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헝가리 작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의 국내에 소개된 유일한 소설집 ‘서왕모의 강림’의 말미에는 친절한 ‘옮긴이의 말’이 수록돼 있다. 크러스너호르커이의 소설이 단편이어도 쉼표가 거의 없는 ‘만연체’의 길고 긴 문체여서 일반 독자에게는 낯설고 접근이 쉽지 않게 느껴지는 면이 있는 까닭에 역자는 열일곱 편 각각에 대한 소개를 해둔 듯하다. 소개 글을 읽다가 더 흥미가 느껴지는 단편 먼저 골라 읽을 수 있고 작가의 세계가 어렵게 느껴진다면 옮긴이의 말을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문체(文體)는 작가의 개성과 생각을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소설 쓰기 요소의 하나이며 그중 만연체(蔓衍體)는 한자의 뜻처럼 ‘뻗어 나가다’의 의미를 지니는데, 모든 이야기와 인물과 시공간과 상황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만연체의 문장을 읽는 일은 일종의, 작가가 고안해 낸 세계의 흐름에 올라타는 것으로 리듬감과 운율을 느낄 수 있으며 크러스너호르커이의 경우 역자의 표현처럼 “어떤 면에서 명상과 비슷한 행위”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서’의 이야기를 한 단락 정도만 만연체로 시도해 보면, ‘그’는 아테네 국제항공에 막 도착했는데, 자신이 여기에 도착한 게 실수 같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인파와 소음 때문에 아수라장처럼 느껴져 어서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여행 가방이 다른 수화물 칸에 있어서 찾는 데만 해도 시간과 힘이 들었고 드디어 밖으로 나가자 이번엔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쏟아져 내리는 햇살의 열기를 견딜 수가 없는 데다 택시 기사들이 가방을 뺏을 듯 달려들어 도망치듯 그냥 서 있던 택시에 올라타곤, 운전사에게 ‘신타그마’로 가달라고 했는데, 바가지를 씌울 요량으로 택시가 최단 거리로 가고 있지 않아 항의했으나 소용없었고, 운전사가 불쑥 부산한 교차로 길가에서 차를 세우며 여기가 신타그마라고 하기에 지인이 미리 알려준 금액을 내자 운전사가 말도 안 된다고 고함을 질러 몇 명의 그리스인들이 나타나더니 요금 협상을 도와주었다.
지친 그는 젊은이들에 이끌려 그들의 자리에 합석했다. 길바닥에 놓인 인근 레스토랑의 테이블이었다. 서로 자기소개를 하며 젊은이들은 돈도 미래의 계획도 없고 오늘의 계획이라고는 그저 맥주 한잔을 천천히 마시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선량하고 쾌활한 게으름뱅이들”이라고 ‘판단’했으며 그래도 그들과 있다 보니 어떤 이해와 신뢰감을, 기분도 좋아진다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온 이유는 아크로폴리스를 보기 위해서, 그 꼭대기에 올라가고 싶다는 오랜 꿈 때문인데 그들과 같이 더 있다가는 오전부터 주변이나 둘러보며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게 될까 봐.
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크로폴리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점점 더 통증처럼 느껴지는 뙤약볕 아래서 눈조차 뜨기 어려운 상태로,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선글라스도 물도 없이 허기까지 져선. 그는 알지 못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오직 아크로폴리스밖에 없고”, 햇빛이 무척 강해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이곳의 여행객은 반드시 사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그가 평생 보기를 갈망했던 아크로폴리스에 오르는 장면, 결국 등을 지고 있어야 했던 뼈아픈 사정은 이 단편의 절정이자 백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아직 이르다. 다시 몇 시간 전의 그 교차로에 아까와는 달라진 그가 도착했을 때 작가가 보여주려는 의미가 온전히 전해진다. 결말의 반전과 아이러니에 대한, 작가가 공들여 숨겨놓은 단서는 서두에 이미 있었고.
이제 그는 여전히 거기에 앉아 자신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맞은편의 젊은이들을 보고 있다. 간절히 원했던 소망은 우스꽝스러워졌는데, 저 자리에서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면 훨씬 행복했을 거라고 깨달으며. 왠지 새로 사귄 친구들과 집에 있는 듯한 오늘의 큰 기쁨을 교차로에서 느끼며 그는 차도로 발을 내디뎠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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