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결합 요구 거절당하자 흉기살해
교제 내내 폭력…재판받던 중 범행
“우발적…심신미약 상태” 선처 호소
유족 “거짓 반성”…대법서 징역 30년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전 여자친구를 살해해버렸네요.”
지난해 9월3일 오후 7시쯤 부산 연제구 연산동의 한 오피스텔. 자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옥상 난간에 앉아 있던 남성과 대화를 시도했다. 주차장엔 에어매트가 설치됐다. 1시간이 넘는 대치 끝에 이 남성은 경찰에 체포됐고, 같은 시각 해당 오피스텔에선 20대 여성이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됐다. 이 오피스텔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2023년 7월쯤 30대 남성 A씨는 한 주점에 놀러갔다 우연히 20대 여성 B씨를 알게 된 뒤 교제를 시작했다. 사귀는 내내 A씨의 폭력적인 모습이 이어지자 B씨는 A씨에게 결별을 통보했다. 이후에도 A씨는 B씨의 집에 찾아와 현관 비밀번호를 이것저것 눌러보는가 하면 문에 귀를 대고 기척을 살피거나 밤새 집요하게 문을 두드렸다. 계속된 스토킹과 폭행에 대한 두려움에 B씨는 어쩔 수 없이 만남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경찰에도 3차례 신고하는 등 도움을 요청했지만 A씨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B씨는 가족들에게 “화장실 물 내리기도 무섭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실제 A씨는 B씨에게 여러 차례 상해를 입힌 혐의로 울산지법에서 재판을 받던 중이었다.

이별과 재결합, 교제 폭력이 반복되던 지난해 9월3일 새벽, A씨는 친구로부터 “B가 네 중학교 후배와 사귀는 것 같다”는 말을 듣게 됐다. 같은 날 아침 A씨는 해당 후배의 직장을 찾아가 “네가 B를 포기하면 안되냐”고 무릎을 꿇고 빌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직후 자신의 집에서 평소 자신이 먹던 정신과 약을 먹고 흉기를 챙긴 뒤 B씨 집으로 향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한 달 전 B씨는 A씨를 피해 긴급주거지로 이사한 상황이었다.
B씨 자택 문 앞에서 4시간 동안 잠복해 있던 A씨는 오후 6시34분쯤 B씨가 집 앞에 놓인 배달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문을 연 순간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이곳에 배달을 한 배달기사는 당시 어떤 남성이 오피스텔 계단에 앉아있었고, 자신에게 음식을 주면 된다며 현금을 주겠다고 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배달 기사가 “왜 이렇게 하냐”고 묻자 남성은 “여자친구 집인데 서프라이즈 하려고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다시 만나 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한 A씨는 미리 준비한 흉기를 11회 이상 휘둘렀고, 약 1시간 뒤 “여자친구를 죽였다”고 112에 신고했다. 구급대원이 강제로 문을 개방해 들어가자 B씨는 현관문 앞에서 의식을 잃은 채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다. 사인은 다발성 자창이었다.
A씨는 재판 과정에서 “흉기는 (내가) 죽기 위해 챙긴 것으로 우발적 범행일 뿐 계획범죄가 아니었다”며 “정신과 약에 의해 심신미약 상태였다”고 선처를 호소했다.
유족은 ‘무기징역’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피해자의 여동생은 지난 1월 열린 공판에서 “A씨의 범행으로 저를 포함한 온 가족들의 일상이 무너졌다. A씨가 보이고 있는 반성의 태도는 감형을 받기 위한 거짓 반성이다. 유족들은 A씨로부터 어떤 사과 한마디도 받지 못했다”며 “A씨가 다시 사회에 나올 경우 유가족들에게 어떤 보복을 할지 모른다. 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A씨가 어떤 선처도 없이 자기 죗값을 받는 것”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1심 재판부는 A씨에게 징역 25년과 전자장치 부착 명령 10년을 선고했다. 1심은 “A씨가 피해자 집 앞과 옥상 등에서 문이 열리기를 4시간 동안 기다렸고, 정작 집 안에 들어가 머무른 시간은 단 2~3분에 불과했다. 우발적 범행이라고 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라 계획범죄로 판단된다”며 “피고인은 범행 이후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는 언동을 보이긴 했으나, 흉기로 자해를 시도하진 않았다. 범행 직후엔 친구나 가족과 전화한 내용, 112신고 내용 등을 보면 심신미약 상태라고도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A씨는 ‘형이 무겁다’는 이유로, 검찰은 ‘형이 가볍다’는 이유로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검찰의 항소 이유를 받아들여 A씨에게 원심보다 높은 징역 30년과 보호관찰 5년을 선고했다. A씨는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14일 원심 판단에 잘못이 없다고 보고 이를 기각했다. 이에 징역 30년의 원심 판결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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