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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익는 안동 산골마을 전통주 장인 된 IT기업가 [마이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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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10-15 06:00:00 수정 : 2025-10-14 20:36:13
안동=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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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 맹개마을 대표

쉼 없이 뛴 벤처 1세대
1호 티켓 예매 ‘예스컴’ 시작
‘인포아트’·‘컨피테크’ 잇단 창업
사업은 궤도 올랐지만 번아웃

오지 맹개마을과의 만남
도시 탈출 결심하고 전국 물색
낙동강 휘감은 산촌땅 통째로 사
폐가만 남은 마을서 밀농사 시작

‘안동 진맥소주’의 탄생
쌀 아닌 밀소주 개발 8년 매달려
국제품평회서 5년연속 ‘더블골드’
뉴욕·런던 미슐랭 식당까지 납품

뿌리 깊은 ‘밀소주’ 알린다
조선 요리서 곳곳 양조법 기록돼
안동소주 책 발간·품질규약 정비
맹개마을, 미식 여행지로 선보여

다들 미쳤다고 했다. 경북 안동에서 안동소주를 밀로 만들어 보겠다는 그의 말에. 쌀이 아닌 밀로 만들면 그걸 안동소주라고 할 수 있어? 밀로 만든 소주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그걸 왜 만들어? 의심의 눈초리는 사정없이 가슴을 팍팍 찔렀고, 그럴 때마다 자신감은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스스로도 반신반의하던 세월이 7~8년. 벤처 기업을 창업하던 뚝심으로 뚜벅뚜벅 걸었고 오랜 번민과 고통은 달콤한 열매를 안겼다. 밀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전통방식 증류주, ‘안동 진맥소주’의 탄생이다. 진맥소주는 유명 국제주류품평회에서 최고상을 받을 정도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집념으로 안동소주의 새 장을 연 이는 박성호(56) 맹개마을 대표 겸 농업회사법인 밀과노닐다 기획이사. 벤처 창업 1세대로 잘나가는 정보기술(IT) 전문가이던 그는 어떻게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한국 전통주 장인으로 거듭났을까.

박성호 맹개마을 대표 겸 밀과노닐다 기획이사가 경북 안동시 맹개마을 메밀밭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500년 전 전통 밀소주 ‘안동 진맥소주’를 복원해 세계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는 박 대표는 맹개마을을 건강한 자연 식재료와 전통 소주를 즐기는 여행지로 만들어 가고 있다. 안동=최현태 선임기자

◆술 전문가로 변신한 IT 전문가

박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은 아주 멀고 험하다. 맹개마을이 ‘육지의 섬’으로 불릴 정도로 오지 중의 오지이기 때문이다. 안동역에서 두 시간을 차로 달리고 낙동강을 대형 트랙터로 건너 맹개마을로 들어서자 농사일로 얼굴이 검게 그을린 박 대표가 환한 표정으로 맞는다. 박 대표 너머로 펼쳐진 너른 들판에는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져 가을 정취가 가득하다. “11월 초에 밀을 심고 이듬해 6월 밀을 수확한 자리에 메밀을 심어요. 농사 짓는 땅은 3만평이며 모두 친환경 농법을 고수합니다. 쌀 소주는 시원한 맛이 특징이고 밀소주는 기름진 느낌이 있어 좀 더 부드럽고 고소하며 스파이시한 맛이 도드라진답니다. 물 맑고 공기 좋은 자연에서 자란 건강한 밀로 만들어서 그런지 마셔본 분들은 진맥소주가 아주 맛있다고 하네요. 하하.”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처럼 실제 진맥소주는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국제주류품평회에서 안동 진맥소주 53도(2020·2021·2023년), 40도(2024·2025년) 제품이 다섯 차례 최고상인 더블골드를 받았을 정도다. 2019년 진맥소주를 세상에 선보인 지 불과 2년도 안 돼 일군 대단한 업적이다.

“진맥소주가 이제 자리를 잡는 것 같아요. 2023년부터 뉴욕, 샌프란시스코, 런던, 홍콩, 싱가포르 등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뉴욕 주옥, 런던 솔잎 등 요즘 핫한 레스토랑에서도 진맥소주를 만날 수 있답니다.”

그는 2023년 안동소주협회를 창립해 지난 3월까지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처럼 박 대표가 지금은 한국 전통 증류주를 대표하는 생산자 반열에 올랐지만 맹개마을에 정착하기 전까지 그의 삶은 술 양조와 아예 무관한 IT 전문가였다. 국내 최초의 영화·공연 티켓 예매 사이트 ‘예스컴’ 창업자가 바로 박 대표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뒤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정보공학을 공부했다. 6년 유학을 마치고 1997년 한국으로 돌아오자 벤처 붐이 일기 시작했다. 막 인터넷이 보급되던 시기였는데 남보다 먼저 IT를 전공한 터라 운 좋게 초기 인터넷 사업 창업자 대열에 낄 수 있었다. 종합일간지 실시간 기사 인터넷 전송 시스템 구축, 인터넷 방송, 기업 전산 시스템 사업 등을 도맡았다. 특히 문화관광부와 손잡고 영화, 공연 티켓을 인터넷으로 구매하는 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선보였는데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사업이었다.

그는 이어 콘텐츠 사업으로 눈을 돌려 1999년 ‘인포아트’를 창업했다. 문화예술 콘텐츠, 영화 인터넷 시청, 티켓 예약 사업이었는데 큰돈은 되지 않았다. 이에 서울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 지하 400평 규모 나이트클럽을 임대해 공연 보면서 술 마시는 ‘디너 시어터’를 열었다가 그만 수십억원만 날리고 사업을 접었다. 초심으로 돌아간 그는 2003년 ‘컨피테크’를 창업, 자동차 운행 데이터 등을 수집하는 임베디드 시스템을 개발해 현대자동차에 공급했다. 한 와이파이 존에서 다른 존으로 이동할 때 연결이 끊이지 않고 자동 전환되는 KT 무선망 ‘네스팟’도 그의 작품이다.

◆맹개마을 풍경에 반해 귀농 결심

쉬지 않고 기술을 개발한 덕분에 손실을 만회하고 사업도 정상 궤도에 올랐지만 갑자기 ‘번아웃’이 찾아왔다. 기술 개발자 역할보다 밤에도 영업을 뛰면서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이 숨통을 조였다. 커가는 아이들을 주말에 한 번 겨우 볼 정도로 일에 매몰돼 자신을 점점 잃는 현실도 서글펐다. 이에 그가 내린 결론은 도시 탈출. 사업체를 통째로 선배에게 매각하고 주말마다 살기 좋은 마을을 찾아 전국을 뒤지기 시작했다.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초등학교 4학년까지 강원 도계에서 자연과 뛰어놀며 자란 터라 도시를 떠나는 두려움은 없었다.

“2006년 말 우연히 부모 고향인 안동의 산에 올라갔다가 너무 험해 길을 잃고 말았어요. 산을 헤매다 갑자기 눈앞에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지더군요.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 둥그런 지형의 맹개마을입니다. 보는 순간 이 땅을 제게 달라고 하늘에 기도할 정도로 운명처럼 느껴졌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퇴계 이황 선생이 다녀갔고, 맹개마을 풍광을 담은 ‘경암(景巖)’ 등 그가 지은 시도 2편 전해질 정도로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 하지만 교통이 너무 불편한 오지라 마을 사람들이 다 이주하고 폐가만 3채 남아 있었다. 수소문 끝에 박 대표는 4~5년에 걸쳐 땅 주인들을 찾아냈고 맹개마을 3만여평을 통째로 사들여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무조건 도시를 떠나 새 삶을 사는 게 목적이어서 처음에는 딱히 뭘 하겠다는 계획이 전혀 없었어요. IT가 전공이니 어디서든 원격으로 일하면 밥은 먹을 수 있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했죠. 그런데 농지법상 농사만 가능한 땅이더군요.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시작했는데 혼자서도 비교적 쉬운 밀과 메밀 농사입니다.”

하지만 일 년 내내 농사 지어도 손에 쥐는 돈은 서울 자영업자 한 달 수익에 불과했다. 2~3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아내가 안동에 수학 학원을 차려 가족을 먹여 살렸다.

“그때 아내가 그러더군요. 나는 현재를 살게 해줄 테니, 당신은 맹개마을의 미래를 구상하라고. 아내 덕에 큰 용기를 얻었죠. 꽤 여러 해 맹개마을에 틀어박혀서 다양한 실험을 했답니다. 밀로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해 봤어요. 밀가루를 제분해 국수를 만들고 프랑스식 천연 발효 빵도 만들어 팔았죠. 그러다 안동에서 유명한 소주가 눈에 보이더군요. 밀도 곡식인데 밀로 안동소주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죠.”

외국에서는 호밀로 위스키를 만들고 중국의 바이주도 수수, 쌀, 보리 외에 밀도 많이 들어간다. 이에 밀소주는 충분히 승산이 있어 보였다. 더구나 박 대표는 취미로 소믈리에 자격증을 땄고 대학에서 와인 강의도 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다만 증류식 소주는 매우 낯설었다. 더구나 쌀이 아닌 밀로 안동소주를 만들겠다고 하자, 전문가들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지으며 뜯어말렸다. 그때마다 위축됐지만 박 대표는 여러 자료를 뒤지고 안동의 명인들에게 양조법을 배워 밀소주에 도전했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7~8년 정도 지나니 세상에 내보여도 될 만큼 품질이 좋아졌고 비로소 2019년 진맥소주가 탄생했다.

◆고서에 등장하는 밀소주

밀소주 상품 이름을 고민하던 박 대표는 고서를 뒤지다 안동의 선비 김유가 1540년쯤 완성한 요리서 ‘수운잡방(需雲雜方)’에서 놀라운 사실을 찾아냈다. 책에는 122가지 요리법이 적혀있고 이 중 술은 62개인데, 대부분 발효주이고 유일하게 언급된 증류주가 바로 ‘진맥(眞麥) 소주’다. 진맥은 밀의 옛말로 안동 어르신들은 지금도 밀가루를 ‘진가루’로 부른다. 또 1670년 안동의 사대부 여성 장계향이 며느리 등 집안 여인들에게 음식 조리법을 전하기 위해 한글로 저술한 ‘음식디미방’에도 밀소주, 쌀소주, 찹쌀소주 양조법이 적힌 사실을 확인했다. “고서들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우리 전통 소주는 14세기 몽골군이 고려에 주둔하면서 전파한 증류주로 추정되는데, 고서 기록 덕분에 원래 밀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겁니다. 저의 도전이 무모하지 않았고, 전통 밀 소주를 복원까지 했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쁘고 뿌듯했답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상품 이름은 ‘안동 진맥소주’로 결정했다. 이미 문헌에 등장하는 이름이라 상표등록은 불가능했지만 상관없었다. 역사적인 우리 술을 알리는 것이 더 중요했기에. 박 대표는 한 발 더 나아가 2023년 안동소주 역사를 집대성한 책 ‘안동소주, 7백년 음식 유산’을 발간했고 올해 영문판도 제작했다. 그는 안동소주협 회장을 맡아 원료와 품질 기준을 정하는 규약과 도지사 인증제도도 도입했다. 안동소주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도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국제 행사가 매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와인·스피릿 엑스포 프로바인. 박 대표는 9개 업체와 지난해부터 전시장에 ‘안동소주관’을 차리고 해외 바이어와 적극적인 수출 상담을 벌인 끝에 수출 물량이 조금씩 늘고 있다. 또 안동 소주를 상징하는 공동 주병 디자인과 브랜드 아이덴티티(BI) 제작도 완성했다.

농림축산식품부, 한식진흥원, 코레일관광개발이 주도하는 ‘K미식벨트’ 사업에 올해 ‘안동 전통주 벨트’가 선정됐는데 박 대표는 진맥소주는 물론, 안동소주의 매력을 알리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안동소주와 특산 음식을 즐기는 1박2일 프리미엄 여행 상품 ‘안동 더 다이닝’이 오는 24일부터 11월 21일까지 매주 금요일 4차례 진행되며 맹개마을도 포함됐다. 지난 8월부터 tvN에서 방영을 시작한 미국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제작 드라마 ‘버터플라이’도 맹개마을에서 촬영됐다. 또 2023년 방영된 아이돌 그룹 세븐틴의 예능 프로그램 ‘인더숲 세븐틴편 시즌2’ 배경도 맹개마을이다.

박 대표는 이처럼 입소문을 타고 있는 맹개마을을 단순히 술을 만드는 곳이 아니라 전통 소주와 자연이 키운 건강한 식재료를 즐기고,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휴식하는 ‘팜 투 테이블(Farm to Table)’ 여행지로 키워나가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낙동강과 병풍처럼 늘어 선 절벽이 살포시 품고 있는 맹개마을은 풍광이 아주 빼어납니다. 모든 번민을 내려놓고 힐링하기 좋아요. 한국을 대표하는 양조장과 여행지로 잘 키워 갈 테니 많이 놀러 오세요.

 

박성호 맹개마을 대표는…

 

●1969년 경북 울진 출생 ●연세대학교 수학과 졸업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 정보공학과 졸업(석사) ●예스컴 대표 ●인포아트 대표 ●조선대학교 겸임교수 ●경기문화재단 기획전문위원 ●농식품장관상(2020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2021년) ●경북도지사 표창(2023년) ●저서 ‘안동소주, 7백년 음식 유산’ ●(사)안동소주협회 초대 회장 ●(사)경북전통주협회 사무국장(2023~) ●진맥소주 마스터 디스틸러 (2019~) ●맹개마을 대표 겸 밀과노닐다 기획이사(2017~) ●샌프란시스코 세계주류품평회 더블골드 5회 수상(안동 진맥소주 53도·40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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