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 위해 힘·희생은 물론 목숨까지 바칠 것”
교황 지키다 전사한 스위스 용병 147명 기려

4일(현지시간) 바티칸시티 교황청의 아포스톨리코 궁전 안뜰. 흔히 ‘사도궁’(使徒宮)으로 불리는 이 교황의 관저 건물 앞에서 새로 교황청 근위대원이 된 군인 27명의 선서식이 열렸다. 눈길을 끈 것은 지난 5월 즉위한 교황 레오 14세가 이례적으로 직접 이 행사를 주재했다는 점이다.
AP 통신에 따르면 스위스 군인들로 구성된 교황 근위대의 창설은 율리오 2세 시절인 15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가 600년을 훌쩍 넘긴 이 근위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상비군(standing army)’으로 불리는 이유다.
신임 근위대원들의 선서식은 5월 6일 열리는 게 관행인데, 올해는 거의 5개월가량 지연됐다.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4월 21일 선종(善終)함에 따라 장례 미사(4월 26일)와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5월 7∼8일) 등으로 교황청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레오 14세가 교황으로 정식 임기를 시작한 것은 지난 5월 8일의 일이다.

이날 근위대원 선서식은 특별히 레오 14세가 직접 주재했다. 2015년부터 근위대를 지휘하는 크리스토퍼 그라프 사령관(스위스 육군 대령)은 “신임 근위대원 선서식을 교황이 직접 주재한 것은 바오로 6세 시절인 1968년 이후 5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교황청은 레오 14세가 왜 그런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는지에 관해선 별도의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이를 두고 갈수록 신병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 근위대의 사정을 잘 아는 레오 14세가 자신의 권위와 인기를 활용해 근위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깜짝’ 행보에 나선 것이란 해석이 제기된다. 근위대는 응모 자격부터 까다로워 가톨릭 신앙을 믿는 19∼30세의 스위스 미혼 남성만 지원이 가능하다. 키가 1m74㎝(5피트 7인치) 이상이고 주변의 평판이 좋아야 한다. 또 스위스군의 기본 군사훈련을 마친 뒤 최소 26개월 동안 로마에서 복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5년 이상 근무한 근위대원은 결혼을 할 수 있으나 이 경우 3년의 의무 복무 기간이 추가된다. 근위대원은 야간에 외출이 허용되나 통행금지(통금) 시간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 근위대 관계자는 “여러 제약 때문에 신병을 구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밝혔다.

교황 근위대가 스위스군으로만 채워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1527년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던 신성로마제국이 로마로 군대를 보내 교황청을 습격했다. 여러 나라 출신 용병으로 구성된 교황청 수비대는 항전 도중 와해됐고, 스위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 용병들은 뿔뿔히 흩어져 도주했다. 스위스 용병들은 189명 가운데 147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교황을 무사히 대피시킬 수 있었다. 이후 교황 근위대는 스위스 군인으로만 채우는 전통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이날 신임 근위대원 선서식에선 레오 14세와 나란히 카린 켈러주터 스위스 대통령도 함께하며 자국 용사들의 늠름한 모습을 지켜봤다.
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대는 평균적으로 약 135명 규모의 소수정예 병력을 유지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근위대의 역할은 전통 의상을 입고 교황청의 각종 의식과 행사에 참여하는 의장대와 비슷하게 축소됐다. 오늘날 바티칸시티의 치안 유지는 물론 교황의 신변 경호 임무도 이탈리아 정부가 파견한 헌병 부대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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