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최연소’ 고이즈미 vs ‘첫 여성 총리’ 다카이치
2강 구도서… 무섭게 기세 올리는 하야시 관방장관
4일 치러지는 일본 집권 자민당 총재선거 막판 판세가 요동치고 있다. 출사표를 낸 5명의 후보 중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이 단연 ‘2강’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되다가 최근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이 무섭게 기세를 올리고 있어서다.

3일 일본 주요 언론의 국회의원 295명 표심 분석을 종합하면 고이즈미 후보가 70표 가까이를 모은 가운데 하야시 후보가 50여표를 확보, 40표에 다소 못 미치는 다카이치 후보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자민당 지지층 사이에서는 여전히 고이즈미, 다카이치 두 후보가 지지율 선두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지만, 하야시 후보 역시 지지율을 20%대까지 끌어올렸다. 며칠 사이 일본 언론들이 결선투표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후보로 하야시 후보의 이름을 넣기 시작한 이유다. 5파전 속 ‘2강’ 구도가 ‘1강 2중’ 내지 ‘3강’ 구도로 변화한 셈이다.
자민당 총재는 중·참의원 국회의원 295명과 100만명에 가까운 당원·당우 투표 결과를 각각 50%씩 반영해 선출된다. 의원은 1인1표인 반면 당원·당우표는 295표로 환산된다.
대신 1차 투표에서 과반(296표)을 획득한 후보자가 없어 결선투표가 치러지면 상황은 급변한다. 결선에선 당원·당우표 대신 47개 도도부현(광역지방단체)에 각 1표가 주어져 의원 표심이 당락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상대적으로 ‘인기투표’ 양상이 옅어지고 향후 정국 운영이나 외교적 파장 등에 대한 고려가 강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총재선거에서 2위로 결선투표에 오른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1차 1위였던 다카이치 후보를 꺾었던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자민당 새 총재는 오는 15일쯤 국회의 총리 지명선거를 거쳐 이시바 총리의 후임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소야대’ 정국이긴 하지만 야권이 분열돼 있어 야당 대표 중에서 총리가 배출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누가 총리가 되느냐에 따라 향후 한·일 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전후 최연소’ 총리 노리는 고이즈미
고이즈미 후보는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가 강점이다. 당내 젊은층을 중심으로 파벌 비자금 문제로 장기 침체에 빠진 당을 쇄신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높은 인지도와 호소력, 준수한 외모로 향후 ‘선거의 얼굴’로서 활약해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퍼져 있다.
1981년 4월생인 고이즈미 후보는 지난해 총재에 당선됐더라면 일본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의 44세 3개월 기록을 깨고 최연소 총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나 최연소 총리는 불가능해졌고, 이번에 당선돼 국회의 총리 지명선거 문턱까지 넘으면 ‘전후(戰後) 최연소’ 총리 기록은 얻게 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뒤 최연소 일본 총리는 52세에 취임한 아베 신조였고, 40대 총리는 없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차남인 그는 또한 후쿠다 다케오,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에 이어 역대 두 번째 ‘부자(父子) 총리’ 자리도 넘보고 있다. 그의 형은 배우로 활동 중인 고이즈미 고타로다. 부인은 후지TV 아나운서 출신인 프랑스·일본 혼혈 다키가와 크리스텔이다. 고이즈미보다 4살 연상인 다키가와는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전 당시 손님에 대한 일본의 환대를 뜻하는 ‘오모테나시’를 한 음절씩 끊어 말해 인상을 남긴 적이 있다.
고이즈미 후보는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정기적으로 참배하는 인사이지만, 한국과의 관계에는 상대적으로 유연한 태도다. 지난 8월 방한 당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분향 후 헌화하기도 했다.
고이즈미 후보는 이번 선거전에서 부부가 다른 성(姓)을 쓰는 것을 허용하는 ‘선택적 부부 별성제’ 도입과 관련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면서도 “정책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 나가겠다”고 했다. 아베 전 총리 2차 집권의 기반이 된 보수계 의원 연맹 ‘창생일본’의 핵심 인사인 가토 가쓰노부 재무상을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당원들 표심을 의식해 보수 색채를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스가 요시히데 전 총리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고노 다로 전 디지털상도 고이즈미를 공개 지지하고 나섰다.
고이즈미 후보의 약점으로는 잦은 말실수와 토론 실력이 꼽힌다. 환경상 시절 기후변화에 “즐겁고(Fun), 쿨(Cool)하고, 섹시(Sexy)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발언을 해 한국에서는 ‘펀쿨섹좌’로 통하는데, 엉뚱한 말을 많이 해 ‘고이즈미 어록’이 존재할 정도다.
그는 이번 TV토론에서도 사전에 준비한 원고를 참고하면서 답변하는 모습을 보여 정책 이해도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첫 여성 총리 자리 넘보는 ‘여자 아베’ 다카이치
일본의 첫 여성 총리를 노리는 다카이치 전 장관은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우경 노선을 계승하는 정치인이다. 한국이 독도에 구조물을 더 만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발언하는 등 한국에도 강경한 자세다.
그가 이번에 당선되면 자민당 최초의 여성 총재가 된다. 남성 세습 의원이 많고 여성 정치인에 대한 장벽이 높은 일본에서 ‘유리천장’을 깨온 그는 첫 여성 총리가 될 가능성도 있다.
‘여자 아베’라는 별명은 다카이치의 강점이자 취약점이다. 우파 지지층을 신생 정당 참정당 등에 빼앗긴 것을 아쉬워하는 당내 보수층의 구심점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경계심도 많다. 우파 노선으로 한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 수 있다는 우려, 야당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 등이 의원들 사이에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차기 총리 적합도 여론조사에서 1, 2위를 다투면서도 각 언론이 조사한 의원 표심에서는 고이즈미, 하야시 후보에 밀려 3위로 처져 있는 이유다.
다카이치 후보 역시 야스쿠니신사를 정례적으로 참배한다. 지난해에는 총리가 되더라도 참배하겠다고 명시적으로 밝힌 데 반해 이번에는 “적절히 판단하겠다”며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강경 우파 이미지를 희석하려는 시도로 풀이됐다.
하지만 의원 지지세가 옛 아베파에 주로 머무르며 확장성에 한계를 나타내자 최근 보수 본색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보수 성향 당원표를 결집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시마네현의 소위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표현)의 날’ 행사와 관련해 “원래라면 당당하게 장관이 나가면 된다”며 일본 정부 참석자를 정무관(차관급)에서 격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야스쿠니신사 ‘A급 전범 분사론’에도 부정적 견해를 표명했다.
혼슈 서부 나라현 출신인 그는 소견 발표회에서 나라공원의 사슴 폭행 사건을 언급하며 “일본인의 기분을 짓밟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외국에서 온다면 뭔가를 해야 한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겠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 7월 참의원(상원) 선거를 계기로 확산하는 배외주의에 기댄 발언이었는데, 이후 토론회에서 원로 언론인에게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나라현 당국도 그의 주장을 부인했다. 한 일본 기자는 “다카이치 후보가 나라 사슴 발언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며 “상식을 가진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말했다.

◆야마구치현 세습 의원 출신 ‘금수저 정치인’ 하야시
이변의 주인공을 노리는 하야시 후보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치인이다.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운수·부동산 회사 등을 운영하는 지역 재벌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대장상 등을 지낸 하야시 요시로다.
도쿄대 출신으로 종합상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고, 미국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을 나왔다. 영어에도 능통하다.
야마구치현은 일본 보수정치의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옛 지명이 조슈번으로,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다는 자부심이 있는 지역이다. 초대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부터 아베까지 총리만 8명을 배출했다. 1995년 이곳에서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돼 국회에 입성한 하야시 후보를 “야마구치현 출신 9번째 총리로 만들자”는 집회가 최근 열려 옛 아베파 의원도 3명 참석했다고 한다.
야마구치현에서 하야시 가문은 아베 가문과 오랫동안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 왔는데, 하야시 후보는 2022년에는 야마구치현 중의원 선거구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아베 전 총리와 차기 총선 선거구를 두고 경쟁하는 불편한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하야시 후보는 외무상, 방위상, 문부과학상 등을 지내며 쌓은 풍부한 경험과 안정감이 강점으로 꼽힌다. 온건·중도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며, 최근 야스쿠니신사와 관련해서는 “황실(왕실)을 포함해 거리낌 없이 참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정치의 책임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이후로 역대 일왕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중단된 만큼 사실상 ‘A급 전범 분사론’을 꺼내든 것이다.
옛 기시다파 출신으로 기시다 후미오 전 총리의 지원을 받고 있다. 옛 기시다파는 한국, 중국 등 이웃 나라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이 있는 당내 비둘기파로 알려져 있다. 하야시 후보는 일·중우호연맹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시바 총리로부터는 관방장관으로 발탁됐다. 총리에 이어 미디어 노출이 많은 데다 부처 간 정책 조정, 위기 관리, 총리와 당 사이의 조율 역할을 해 ‘내각 2인자’로 꼽히는 자리다. 하야시 후보는 이시바 내각의 계승을 내걸고 있으며 미·일 관세협상 전반에 대해 자신보다 더 상세히 아는 후보가 없다는 점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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