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핵 포기시키고 美 한 일 알아
제재풀기와 맞바꾸는 협상은 없을 것”
핵 반격 언급… 핵보유국 지위 노골화
중·러와 밀착 통해 전략적 위상 높아져
對美 대화통해 정상국가 노림수 분석
이재명 ‘페이스메이커론’도 시험대에
정부 “긴 안목으로 남북 적대성 해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 포기와 제재 해제를 맞바꾸는 방식의 핵 협상이 더는 유효하지 않다고 못 박으면서 한·미가 고수해 온 북한 비핵화 원칙이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위원장이 핵 보유국 인정을 전제로 미국을 향해 대화 제스처를 보낸 반면, 남한과는 일말의 접촉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으면서 이재명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론’ 역시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미국에 대화 손짓하지만 “비핵화는 없다”
22일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전날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좋은 추억”을 언급하며 미국과의 대화 재개 가능성을 시사하면서도 ‘비핵화 불가론’을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특히 “핵을 포기시키고 무장해제시킨 다음 미국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세상이 이미 잘 알고 있다”면서 “제재 풀기에 집착하여 적수국들과 그 무엇을 맞바꾸는 것과 같은 협상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미의 기존 북핵 접근법인 비핵화 시 경제 보상책을 약속하는 방식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는 이어 “시간은 우리 편에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북한 비핵화’ 원칙을 고수하며 협상에 임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자신들의 핵 무력은 고도화될 것이라는 엄포다. 자신들에게 군사적 조치를 시도할 경우 한국 등에 핵 공격을 가하겠다고도 경고했다. 김 위원장은 “우리의 전쟁억제력은 지금 행사되고 있으며 나는 이 억제력의 제1사명이 상실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억제력의 제2의 사명이 가동되면 한국과 주변 지역 그의 동맹국들의 군사조직 및 하부구조는 삽시에 붕괴될 것이며 이는 곧 괴멸을 의미한다”고 했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라고 노골적으로 압박한 셈이다. 핵을 쥔 채 미국과 관계 개선을 꾀해 체제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외교적 고립에서도 벗어나 ‘정상국가’화하겠다는 노림수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미국이 먼저 양보를 해야 협상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로, 협상 문턱을 높여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가 강해 보인다”고 진단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김 위원장이 비핵화 관련 입장을 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핵화는 ‘위헌행위’라면서 ‘핵 반격’ 가능성까지 언급한 것은 그간 발표된 다양한 급의 북한 입장 중에서도 강경한 편에 속한다. 김 위원장이 최근 중·러와의 밀착관계를 통해 높아진 전략적 위상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북·중, 북·러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현안 관련 대미 입장, 비핵화 원칙 관련 변화된 입장을 설명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이런 행보의 연속선상에서 대미·대남 입장을 구체적이고 과감하게 표명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적대적 두 국가” 재천명
김 위원장은 한국에 대해선 ‘적대적 두 국가론’의 연원이 남한의 이승만정부에 있다는 새로운 논리를 펼치며 관계 복원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8년 7월 흡수통일 의지가 담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는 조문이 포함된 헌법을 공포했고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문제삼았다. 또 1953년 정전협정을 통해 교전국 관계를 공식 확인했고, 1991년에는 유엔에 동시 가입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독립적인 두 국가로 고착됐다고 주장했다.
북·미 대화 여건을 조성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페이스메이커론’ 구상에 차질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이 핵 보유 인정을 전제로 미국만 상대하겠다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가 현실적으로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이라는 차원에서다. 북·미가 한국을 제외하고 핵 협상을 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 가능성을 막는 것도 숙제다. 이 대통령이 이날 공개된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북·미가 북핵 동결을 조건으로 합의를 이룬다면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비핵화 목표에 대한 합의 없이 동결에 나설 경우 북핵을 용인하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외교부는 이와 관련해 “한·미 양국은 한반도 평화 및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대화에 열려 있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밝혀 왔다”며 “한·미는 향후 북미대화를 포함, 대북정책 전반에 관해 긴밀한 소통과 공조를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통일부는 “정부는 긴 안목을 갖고 긴장 완화와 신뢰 회복을 통해 남북 간 적대성 해소와 평화적 관계 발전을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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