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사고 분쟁이 시작되면 병원 측에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을 뿐 의료과실은 없었다”고 설명하는 사례가 잦다. 환자 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기나긴 법정 다툼이 시작된다. 수년에 걸친 소송 과정에서 환자와 그 가족은 막대한 비용과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하고, 의사는 방어적인 태도로 임하게 된다. 양측의 입장을 모두 경험하다 보면, 이 소모적인 싸움의 끝에서 과연 누가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을지 회의감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과실책임주의는 개인의 부주의가 책임의 근거가 되지만, 복잡하고 위험성 높은 의료 현실을 담아내기에는 몇가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첫째 ‘최선의 진료’ 대신 ‘방어 진료’를 유발한다. 그냥 두면 100% 숨지지만, 어려운 수술을 시도하면 5%는 살릴 가능성이 있는 환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의사는 5%의 생존 가능성보다 95%의 실패 가능성과 그로 인한 법적 책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환자의 유가족이 사망이라는 수술 결과가 나온 뒤에도 5%의 생존 가능성이 있었음을 고려해 줄지도 알기 어렵지만, 수술이라는 결정에 관여한 보호자가 아닌 환자의 다른 유가족이 나중에 나타날 수도 있다. 결국 과도한 책임에 대한 두려움은 환자를 살리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를 가로막고, 이는 사회 전체의 손실로 이어진다.
둘째 ‘과실’의 기준이 모호하다. 의료행위의 특성상 모든 상황에 대한 대처법을 법으로 일일이 정해 둘 수 없다. 결국 평가는 사고 후의 결과를 놓고 이뤄지고, 판단자에 따라 ‘부주의’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이는 의료진에게 예측불가능한 짐을 지우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잘못에만 집중한 나머지 구조적인 문제는 보지 못하게 한다. 한정된 시간에 너무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열악한 진료 환경이 사고의 근본원인일 수 있다. 하지만 과실 책임은 이런 시스템의 문제를 의사 개인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며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이러한 딜레마의 해법으로 무과실 의료보상 제도를 고민해볼 수 있다. 의사의 과실 여부를 따지기 전에 환자에게 발생한 피해를 신속하게 보상하는 데 집중하는 제도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제도를 사회 곳곳에서 경험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산업재해보상보험(산재)과 학교안전공제이다. 건설현장에서 노동자가 재해를 당하면 산재보험은 사업주의 과실을 따지지 않고 먼저 치료비 등을 지급한다.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학생이 다쳤을 때도 학교안전공제는 교사의 책임을 묻기 전에 치료비 등을 지급한다. 이들 제도의 바탕에는 누가 잘못했는가 먼저 따지기보다 발생한 피해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에 집중하자는 사회적 합의가 깔려있다. 위험을 사회적으로 분담해 공동체가 함께 책임지는 시스템인 셈이다.
과실 입증에만 매달리는 현재의 시스템이 의료진을 위축시키고 필수의료 붕괴를 가속하는 현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다. 물론 재원 마련과 보상범위 설정 등 현실적인 과제가 남아있지만, 외국의 사례를 들지 않더라도 산재와 학교안전공제 등에서 이미 무과실 보상 제도로 운영되고 있다,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의사와 환자 간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제도가 무엇일지 고민해야 할 때이다.

김경수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kyungsoo.kim@barun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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