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첸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1993)가 중국 경극의 예술성을 전 세계에 알린 작품이라면, 이상일 감독의 ‘국보’는 일본 전통 무대예술 가부키를 처음 접하는 관객조차 그 아름다움과 극적 감동에 눈뜨게 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 영화다. 올 6월 일본에서 개봉해 흥행 돌풍을 일으킨 ‘국보’는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 초청돼 국내에서 첫선을 보였다.
영화는 야쿠자 집안 출신 소년 ‘키쿠오’(요시자와 료)가 가부키의 ‘온나가타’(여성 역할을 연기하는 남성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는 야쿠자 집안 출신의 아웃사이더이지만 천부적 재능을 인정받아 가부키 명문 하나이 가문의 엄격한 스승 ‘한지로’(와타나베 켄) 아래서 수련한다. 한지로에게는 후계자로 양성하는 아들 ‘슌스케’(요코하마 류세이)가 있으며, 둘은 라이벌이자 동료로 실력을 쌓아간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 명만이 정점에 설 수밖에 없는 법이다.
키쿠오와 슌스케는 때때로 대립하고 상처를 주고받지만, 종국에는 증오 대신 우정과 연대로 각자의 예술을 완성해 간다. 영화는 둘의 복잡한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하며 예술 세계의 냉혹함과 폐쇄적인 혈통주의의 비정함, 남성 중심 문화의 불합리를 드러낸다.


재일동포 3세 이상일 감독은 ‘악인’(2010), ‘분노’(2016) 등 인간의 어둠과 죄를 깊이 파고드는 작품들로 작가성을 인정받은 일본 대표 감독 중 한 명이다. 그는 일본 유명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1968∼)의 동명 원작 소설 ‘국보’(2018)를 영화화해 50년에 걸친 가부키 역사를 배경으로 한 방대한 서사를 완성했다. 제작비는 10억 엔(약 90억원)을 훌쩍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러닝타임은 약 3시간에 달하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시대별 장면 전환으로 전개하는 이야기 덕에 지루할 틈이 없다. 요시자와 료와 요코하마 류세이의 연기 대결은 격투기처럼 스크린을 뜨겁게 달군다. 와타나베 켄의 무게감 있는 연기도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괴물’(2023)로 국내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쿠로카와 소야는 키쿠오의 아역으로 열연을 펼쳐 반가움을 더한다.
2013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가장 따뜻한 색, 블루’로 이름을 알린 튀니지 출신 촬영감독 소피앙 엘 파니는 이번 영화에서도 빼어난 영상미를 선보인다. 목덜미, 땀에 번진 화장, 손끝까지 섬세하게 포착하는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을 물리적 질감으로 시각화한다. 가부키 무대의 화려한 롱샷과 극단적 클로즈업, 핸드헬드 촬영이 어우러져 무대 위 배우들의 숨소리와 땀방울까지 스크린에 담긴다.


영화는 일본 관객과 평단 양쪽의 찬사를 받고 있다. 개봉 102일째인 지난 15일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수익 142억 엔(약 1335억원)을 기록했다. ‘춤추는 대수사선2’(2003)에 이어 역대 일본 실사 영화 흥행 2위에 등극했다.
영화는 올해 5월 제78회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된 이후, 제98회 미국 아카데미상 국제장편영화부문 일본 대표 출품작으로 선정되어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와 오스카 트로피를 두고 경쟁을 펼칠 예정이다.
‘국보’는 연내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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