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전념하다 보면 기쁨 되살아나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런 감정도 안 느껴져요.”
우울증을 앓고 있는 40대 여성 환자가 말했다. 가족과의 외식, 좋아했던 음악, 아이의 웃음소리에도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의 말투는 단조로웠고,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울거나 찌푸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내 마음이 고장 난 기계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것은 감정의 입력과 출력이 모두 끊긴 무쾌감증(anhedonia)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무쾌감증은 단순한 귀찮음이나 무기력이 아니다. 흥미와 감동을 느끼는 능력에 문제가 생긴 상태다. 이것은 우리 뇌에서 쾌감을 느끼고, 동기를 부여하는 보상회로(reward circuit)의 기능 이상 때문에 발생하는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이다. 우울증에 걸리면 도파민을 분비하는 복측피개영역과 쾌감을 처리하는 측좌핵의 연결이 약해져서 기쁨을 예상하거나 실제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이상은 세로토닌 신경전달체계의 활성 저하와 맞물려 감정 둔마와 감각적 단절감으로 이어진다.

항우울제는 도파민과 세로토닌 시스템을 조절하여 무쾌감증을 완화시킨다. 감정과 감각을 가로막는 차단막을 걷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약물치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생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서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가장 효과적인 비약물적 치료법 중 하나가 행동활성화(behavioral activation)다. 기분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분과 상관없이 일상을 행동으로 살아내는 것이 이 치료법의 작동원리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행동활성화 치료를 받은 우울증 환자들은 보상회로를 구성하는 전전두엽과 피질하영역 사이의 신경전달이 향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5분만 걸어보자”처럼, 아주 작은 행동을 실천하면 된다. ‘그까짓 행동이 치료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라고 의심하면 안 된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침대 밖으로 나오고, 샤워하고, 꽃에 물을 주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것이 지구를 구하는 일만큼이나 중요하다. 세속적인 성취나 타인과 사회의 평가와는 상관없는, 오직 자신만의 즐거움을 일궈내야 우울증이 좋아진다.
단골 카페에서 차 마시기, 세상 곳곳에 흩어진 진귀한 노래들을 인터넷에서 찾아 듣기, 손글씨 쓰기, 정치가 아닌 미담이 담긴 신문기사 읽기…. 이런 행동들을 기분이 내킬 때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일과에 규칙적으로 포함해야 한다. 소소한 일상에 전념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기쁨이 반짝이며 되살아난다.
인간은 생존에 필요한 기쁨을 본래 자신 안에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현실에서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이리저리 치이며 살다 보면 감동을 느끼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티게 된다. 습관처럼 마음을 억누르고 살면 즐거움조차 느낄 수 없게 된다. 쾌감을 감지하는 감각마저 자기도 모르게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무쾌감증의 회복은 현실과 감각을 다시 잇는 작은 시도에서 시작된다. 물 한 잔을 마실 때도 신체반응에 집중한다. 차가운 물이 입안을 돌아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여본다. 걸음을 옮길 때 발바닥이 땅을 누르는 감촉과 손 끝에 닿는 바람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려 애써 보자. 감각이 깨어나야 생기가 돌아온다.
잘 먹고, 햇빛을 보며 움직이고, 충분히 자야 한다. 뻔한 말이지만 건강하게 생활해야 무쾌감증도 좋아진다. 감정과 감각이 제 기능을 하려면 신체가 먼저 튼튼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병수 정신건강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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