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모습, 사실극으로 끊임없이 재연
체제의 거짓 마주하는 검열관·어용 작가
작가 샘 홀크로프트 北서 영감받아 집필
검열의 역사적 경험… 배우 호연 힘입어
국내 초연 불구 대부분 무대 매진 기록

여름 공연가 최고 인기작품(예스24 기준)답게 극장은 만석이다. 무대 양옆에는 스무석 남짓으로 하객석까지 마련됐는데 딱 한 자리가 비었을 뿐. 문밖을 지키던 진행요원이 더이상 올 관객이 없다고 알려주자 사회자는 “이 공연은 허가되지 않았습니다. 문화부 허가 없이 진행되는 이 공연에 큰 위험을 감수하고 온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라며 결혼식으로 위장된 공연 개시를 선언한다. 연극 ‘미러’의 시작이다.
예술에 대한 검열이 일상화된 어느 나라 문화부 국장실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참혹한 전선에서 돌아온 군인 출신 자동차 정비공 아덤은 습작처럼 쓴 글 때문에 이 방에 호출됐다. 노련한 문화부 국장이자 검열관인 첼릭은 검열받기 위해 제출된 원고에 ‘불가’ 도장만 찍어도 될 터인데 굳이 아덤을 불러들였다. 방음 안 되는 아파트에서 엿들은 이웃 대화를 마치 사진 찍듯 정확하게 묘사한 아덤에게서 재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첼릭은 “예술은 대중을 고양하고 국가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아덤에게 사실상 체제 선전극을 쓰도록 유도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빚어낸 어용 작가 백스를 멘토 격으로 연결해준다.
아덤은 어수룩해 보이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는 굳은 의지를 지닌 인물. “그저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그의 신념은 순진하다 싶을 만큼 이상주의적이다. 아덤이 검열 회의 자체를 대본으로 써서 다시 제출하면서 등장인물들이 조금 전 나눈 대사는 다시 워크숍 형태로 무대 위에서 재연된다. 사실 그 자체가 얼마나 치명적 무기인지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권력이 검열 없이 존재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검열관 첼릭은 예술적 심미안을 갖췄으면서도 체제의 논리를 강요하는 모순적 존재다. 금지된 문학 작품을 비밀리에 즐기며 신출내기 비서 메이와 공유하려 한다. 하지만 예술 후원자라고 자부했던 자신의 실체가 폭력적 권력자임을 아덤이 쓴 대본을 통해 마주하게 된다.
백스는 한때 재능 있는 극작가였으나 지금은 체제의 품 안에서 안주하는 인물이다. 전쟁 영웅담을 미화한 그의 희곡은 진실을 기록한 아덤의 사실극에 무너진다.
가장 극적 변화를 보여주는 건 메이다. 권위 앞에 잔뜩 움츠린 채 복종만 하다가 진실을 덮는 거짓에 저항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참혹한 전쟁 경험을 통해 체제의 거짓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아덤의 글에서 찾은 진실에 감화된 결과다. 작품의 주제 의식인 표현의 자유와 내면의 진실을 가장 극적으로 구현해내는 인물로서 억눌렸던 개인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변혁을 보여준다.
2023년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된 화제작이 빠르게 한국에 왔다. 작가 샘 홀크로프트는 2011년 북한 여행에서 이 작품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레바논 베이루트의 극작가들과 협업하면서 그들이 검열과 비밀경찰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미러’ 집필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검열’이라는 묵직한 주제의 초연작인데도 6월 말 대학로 예스24아트원 1관에서 시작된 공연 초반부터 14일 마지막 무대까지 매진행렬을 기록한 건 관객 흡인력 있는 서사의 힘을 120% 살려낸 배우들 연기 덕분이다. 작가는 북한 여행에서 영감을 받았다지만 국립극장 등을 통한 정부의 예술지원과 검열, 위협받는 표현의 자유와 군의 거짓된 영웅만들기 등은 모두 우리가 지금껏 봐온 현실과 맞닿은 역사적 경험들이다. 한국 현실에 맞게 개작된 작품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10일 낮 공연에선 첼릭 역의 주민진, 아덤 역의 최호승, 메이 역 이서현, 백스 역 안창용이 완벽한 호흡과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당근과 채찍을 휘두르는 권력과 검열의 화신으로서 주민진이 탁월한 입체적 연기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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