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공화국 시절 정치적 혼돈으로 회귀
5공화국 들어 ‘여소야대’ 동거정부 빈번
“드골식 대통령제 효력 끝… 개헌 필요”
“프랑스는 총리가 너무 자주 바뀌어 그들 중 내가 기억하는 이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프랑스 임시정부 지도자 샤를 드골에게 던진 말이다. 드골은 극심한 모욕감을 느꼈으나 꾹 참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프랑스 제3공화국(1870∼1940)과 4공화국(1946∼1958)은 합쳐서 82년간 내각이 120번 넘게 교체될 만큼 정치가 불안했다. 아무리 자존심이 센 드골도 철저히 ‘팩트’(사실)에 기초한 루스벨트의 지적을 무턱대고 반박할 순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가 제3·4공화국 시절의 정치적 혼돈으로 퇴행하는 것일까. 8일(현지시간) AFP 통신 등에 따르면 여소야대의 프랑스 하원은 이날 오후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가 이끄는 정부를 상대로 불신임 투표를 실시한 끝에 찬성 364표 대 반대 194표로 불신임안을 가결했다. 2026년도 예산안 편성 및 제출을 앞두고 바이루 정부가 ‘긴축 재정’ 기조를 고집하자 야권이 반기를 든 것이다. 현재 프랑스 하원은 재적 의원이 574명(전체 577명 중 3명 공석)인 가운데 가결에 필요한 과반 의석(288석 이상)을 훌쩍 넘겼다.
◆제3·4공화국 시절 정치적 혼돈으로 회귀
이에 따라 바이루 총리 등 현 내각 구성원들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일괄 사직서를 제출하고 전원 물러나야 한다. 지난해 12월 바이루 정부 출범 후 고작 9개월 만의 내각 붕괴다. 직전 미셸 바르니에 전 총리가 이끈 정부도 출범 3개월 만에 단명했고, 바이루 정부 또한 1년을 채우지 못한 채 무너지면서 프랑스 정국은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프랑스는 19세기 후반에 의회 과반 다수의 지지를 얻은 세력이 총리와 장관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이래 수십년간 운영했다. 그런데 미국, 영국 등 일찌감치 양당제가 정착한 나라들과 달리 다당제의 뿌리가 깊은 프랑스는 총선 때마다 원내 과반 다수 세력의 확보에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념적 스펙트럼이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닫는 여러 군소 정당들의 난립 속에서 어쩌다가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하더라도 얼마 못 가서 연정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고 결국 내각 붕괴로 이어진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40년 6월 나치 독일군의 진격 앞에 의회가 ‘계속 싸우자’는 주전파(主戰派)와 ‘그만 항복하자’는 주화파(主和派)로 갈라진 가운데 어느 쪽도 다수를 얻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끝내 망국에 이르고 만 것은 프랑스 의원내각제의 흠결을 드러낸 대표적 실패 사례라고 하겠다.
◆5공화국 들어 ‘여소야대’ 동거정부 빈번
2차대전 후 집권한 드골은 새롭게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며 미국식의 강력한 대통령제 도입을 밀어붙였다. 대통령이 상징적 국가원수 역할에 그친 3·4공화국 의원내각제 시절과 달리 국가 비상사태 선포권과 군 통수권, 외교권 등을 갖는 막강한 대통령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대통령 권력에 대한 민주적 견제를 위해 의원내각제 요소 일부는 살려뒀다. 경제, 민생 등 내정을 총괄하는 총리와 그의 정부는 반드시 하원 과반의 지지를 얻도록 한 점이 대표적이다. 총리 임명권은 대통령에게 있으나 총리가 하원의 불신임을 받는 경우 무조건 물러나게 함으로써 의회에 대통령의 독주를 막을 일종의 ‘거부권’(veto power)을 부여한 셈이다.
이에 따라 프랑스 5공화국은 한동안 대통령의 소속 정당과 하원 다수당이 일치하는 여대야소 정국에선 대통령제처럼, 또 대통령이 속한 여당이 소수당인 여소야대 정국에선 야당이 원내 다수당으로서 총리직을 차지하고 국정 운영을 주도하는 의원내각제처럼 각각 운영돼 왔다. 그중 여당과 원내 다수당이 서로 불일치하는 경우를 ‘동거정부’(同居政府·Cohabitation)라고 부른다. 동거정부 등장 자체를 헌법상 결함으로 단정할 수는 없겠으나, 여소야대 국면에서 대통령과 야당 소속 총리가 서로 충돌하며 발생하는 폐단은 부인하기 어려웠다. 한국의 윤석열정부 시절 소수 여당(국민의힘)과 국회 다수를 점한 거대 야당(더불어민주당)이 사사건건 대립하다가 결국 대통령 탄핵 및 파면으로 귀결된 점을 떠올리면 된다.
◆“드골식 대통령제 운 다해… 개헌 필요”
결국 2000년 프랑스는 5공화국 헌법을 일부 고쳐 대통령 임기를 기존 7년에서 하원의원과 같은 5년으로 단축했다. 아울러 대선 직후 하원 총선을 실시하도록 선거 시기도 조정했다. 대통령을 배출한 여당이 가급적 하원 다수당 지위도 겸해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2022년 대선 및 총선에선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그해 4월 대선은 중도 성향 여당의 지도자 마크롱이 승리해 재선 및 연임에 성공했다. 반면 6월 총선은 여당이 하원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마크롱은 총선 패배 후 2년가량 지난 2024년 6월 하원을 전격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는 승부수를 띄웠으나, 이번에도 중도 여당은 원내 2당에 그치고 좌파 야당들의 연합체인 신인민전선(NFP)이 1위를 기록했다.
이후 현재까지 3년 좀 넘는 짧은 기간 프랑스 정치는 총리가 엘리자베트 보른(2022년 5월∼2024년 1월), 가브리엘 아탈(2024년 1월∼9월), 미셸 바르니에(2024년 9월∼12월), 그리고 이번에 낙마한 바이루(2024년 12월∼2025년 9월)까지 4명 바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다. 다만 마크롱 본인은 여소야대 정국의 진통 속에서도 2027년 5월까지 남은 대통령 임기를 모두 채우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일각에선 “1958년 제정된 5공화국 헌법, 그리고 2000년 이뤄진 임기 조정 개헌의 효력이 사실상 다했다”며 “여소야대 국면의 출현을 아예 봉쇄하거나, 국민과 의회의 신임을 잃은 대통령의 조기 축출을 가능케 하는 하는 등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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