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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우리생물] 보랏빛 전사, 세뿔투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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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8-21 22:57:04 수정 : 2025-08-21 22: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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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길을 오르다 그늘진 계곡에 들어서면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는 보랏빛이 도는 미색 꽃이 눈에 띄곤 한다. 마치 전사의 투구를 닮은 꽃, 바로 세뿔투구꽃(Aconitum austrokoreense)이다. 이름처럼 세 갈래 뿔을 세운 듯한 독특한 잎 모양이 특징인 이 식물은, 지구상에서 오직 한반도 남부에서만 자라는 한국 고유종이다. 1934년 지리산에 자생 중인 것이 처음 학계에 보고된 뒤 지금까지도 식물학자와 자연 애호가들의 큰 관심을 받아 왔다.

 

세뿔투구꽃의 가장 큰 매력은 단연 그 신기한 꽃 모양이다. 고깔 모양으로 위로 솟아오른 위꽃받침잎, 둥근 옆꽃받침잎과 길쭉한 밑꽃받침잎이 어우러진 형상은 마치 고대 무사들이 썼던 투구를 그대로 빼닮았다. 꽃은 8월 말에서 9월 사이에 주로 피는데 연두색에 가까운 미색부터 연한 보라색에 이르는 다양한 빛깔로 계곡 숲을 물들인다. 세뿔투구꽃의 잎은 깊게 세 갈래로 갈라져 있어 일반적인 투구꽃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이 매혹적인 꽃의 뿌리는 아코니틴(aconitine)이라는 강력한 독성 알칼로이드 성분을 지니고 있다. 독성이 너무 강해 잘못 다루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반면 한의학에서는 ‘초오(草烏)’라는 약재로써 통증 완화나 순환기 질환 치료에 쓰이기도 했다.

 

한편 지구상 오직 우리나라 땅에서만 자라는 이 꽃은 무분별한 채취와 서식지 파괴로 1993년부터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식물 Ⅱ급으로 분류되어 보호받고 있다. 최근 유전학적 연구에 따르면, 산발적으로 흩어진 서식지로 인해 개체군 간 교류가 거의 없어 유전적 다양성이 크게 줄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곧 기후변화나 병해충 같은 외부 위협에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세뿔투구꽃의 보전은 단순히 희귀한 꽃 한 종의 보호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식물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서식지의 곤충과 다른 식물, 나아가 그곳에 기대어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위협받는다는 의미이며 결국은 우리의 생태계 전체가 흔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한 보호 차원을 넘어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체계적인 보전 전략이 필요하다. 먼저 자생지를 체계적으로 보호하고 훼손된 지역은 복원해야 한다. 또한 인공증식과 복원 연구를 통해 건강한 개체군을 회복해야 한다. 아울러 장기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개체 수와 유전적 변화를 추적하고 이를 국가 차원의 생물자원 관리 정책과 연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 모두의 관심과 참여가 절실하다. 산행 중 매혹적인 꽃을 만나더라도 꺾거나 가져가지 않고, 눈으로만 감상하는 것이 가장 큰 보전이다. 또한 이러한 꽃의 존재와 가치를 주변에 알리는 일 역시 소중한 실천이라 하겠다. 작은 관심이 모여야 큰 보전으로 이어진다. 올가을, 산길에서 이 보랏빛 전사를 만난다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자연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보기 바란다.


임채은 국립생물자원관 환경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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