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1월 초 경기 연천군 고랑포 비무장지대(DMZ)에서 북괴가 판 땅굴이 발견됐다. 흔히 제1땅굴로 불리는 이 지하 이동로의 길이는 약 3.5㎞에 달했다. 서울과의 거리는 겨우 65㎞에 불과했으니 북괴가 이를 통해 기습 남침을 시도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벌어졌을지 모골이 송연해진다. 땅굴 발견 당시 미 해군 소속인 로버트 벨린저 소령은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군과 함께 땅굴 조사에 나섰다가 북괴가 심어 놓은 폭발물이 터지며 목숨을 잃었다. 1974년 11월 20일의 일이었다.

1979년 12월 7일 판문점 부근 오솔길에 한 무리의 주한미군 장병들이 있었다. 미 육군 2사단 9연대 1대대 소속 정찰대로, 토머스 앤더슨 중사가 지휘 책임자였다.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피아 식별은 물론 바로 앞에 뭐가 있는지 파악조차 어려웠다. 길을 잃은 정찰대는 그만 북괴 관할 구역의 지뢰밭에 들어가고 말았다. 지뢰에 크게 다친 부대원의 비명 소리를 들은 앤더슨이 그쪽으로 이동하는 도중 다른 지뢰가 폭발했다. 그저 부하의 목숨을 구하려는 마음뿐이었던 앤더슨은 그렇게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꼭 49년 전인 1976년 8월 18일 오전 11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사천교(일명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부근. 유엔군 초소들 사이에 있던 미루나무 한 그루를 상대로 가지치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가 초소 경계병들의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한 경비병들이 “나무를 그대로 두고 돌아가라”고 요구했다. 현장 지휘관인 미 육군 아서 보니파스 대위가 이를 거부하자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도끼에 머리가 깨진 보니파스 대위는 그대로 쓰러졌다, 그 부하인 마크 바렛 소위도 크게 다쳤다. 두 사람은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끝내 숨졌다. 이른바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다.

한미동맹재단(회장 임호영)과 주한미군전우회(회장 로버트 에이브럼스)가 18일 6·25 전쟁 정전 이후 한국 땅에서 북괴의 적대 행위로 전사한 주한미군 103명의 사연이 담긴 공훈록을 펴냈다. 발간일을 8월 18일로 한 것에 대해 한미동맹재단 측은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희생자 49주기를 기리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지난 2024년 1월 1월 JSA 내 캠프 보니파스에 주한미군 장교들을 위한 새 숙소가 준공됐다. 한국 정부가 헌정한 이 건물에는 ‘보니파스 & 바렛 배럭스(Barracks)’라는 명칭이 붙었다. 배럭스란 군인들이 거주하는 막사를 뜻한다. 내년이면 도끼 만행 사건 50주기가 된다. 보니파스와 바렛을 비롯해 이역만리에서 동맹의 안전 보장을 위해 희생한 모든 미군 장병 및 그 유족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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