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 모여 앉아 TV 보며 담소
편안한 옷차림으로 낮잠 청하기도
“집에선 냉방비 부담 크고 무료해
공짜 지하철 타며 ‘마실’ 오기 좋아”
일각선 ‘부정적 한국 이미지’ 우려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린 10일 오후 서울 강서구 김포국제공항 국제선 터미널 1층 대합실. 로비의 동쪽과 서쪽 TV 앞 의자에는 20여명의 노인이 앉아 뉴스를 보고 있었다. 노인 대부분은 운동화에 등산복과 같이 간편한 옷차림이었다. 일부는 피서지에 온 듯 슬리퍼나 샌들을 신고 간식거리를 나눠 먹으며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30도를 웃도는 폭염을 피해 공항으로 나온 고령의 ‘공항 피서족’이다. 노인들은 여름나기가 쉽지 않다. 집에서 온종일 있을 경우 에어컨 비용을 감당할 수 없고 그렇다고 집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하루 종일 있는 것은 눈치가 보여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울 성동구에 사는 이경욱(70)씨는 “김포공항 대합실은 추울 정도로 시원한 데다 물을 마음대로 마실 수 있어 친구들과 매일 온다”며 “서울시내에 이만한 피서지는 없다”고 말했다.
수도권 어디서나 지하철로 연결되는 편리한 교통여건 때문에 김포공항은 평일 50여명의 노인들이 찾는 ‘피서 성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최근 몇년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이나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등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노인들이 이젠 공항을 즐겨 찾고 있는 것이다. 노인들이 공항에 모이는 주된 이유는 ‘공짜’이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국가유공자와 함께 만 65세 이상 노인은 지하철 무임승차 대상이다.
노인들이 김포공항을 즐겨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쇼핑몰과 바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대합실에서 TV를 보다 지루하면 쇼핑몰로 옮겨 쇼핑객을 구경하거나 ‘윈도쇼핑’을 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 내려 공항 대합실로 이동하고 중간에 쇼핑몰로 옮겨 다닐 경우 걷는 거리가 만만치 않아 운동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한 80대 노인은 “통창이라 밖이 훤히 보이는 게 전망도 좋고 시원하니 너무 좋다”고 했다. 점심시간에는 공항 대합실에 위치한 햄버거 가게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거나 쇼핑몰 식당가에서 한끼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도 괜찮은 공항 유인 요인이다. 동네 친구들과 공항으로 ‘마실’을 왔다는 박모(75·여)씨는 “도시락과 커피를 준비해와 먹을 수 있어 돈 한 푼 안 들이고 시원하게 여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공항”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또 다른 공항 피서객 최모(81)씨는 “무료하게 집에 있으면 시간도 안 가고 냉방비도 무시 못해 여름 한 철은 집사람과 함께 공항에 와서 시원하게 보낸다”고 말했다. 또 다른 노인은 “외국인과 종종 연예인들 보러 오는 젊은이들을 보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고 귀띔했다. 이들 공항 피서족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공항철도를 이용해 인천국제공항을 찾아 기분전환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인천공항의 한 환경미화원은 “일부 어르신들은 돗자리까지 갖고 와 공항 구석에서 편하게 피서를 하는 경우도 있다”며 “시원한 곳에서 여행객 구경하다 보면 지루하지 않게 하루를 보낼 수 있어 많이 오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65세 이상이 전체 주민등록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초고령사회를 맞아 공항 등에 노인들이 붐비는 것은 국내 열악한 노인 복지 실태는 물론 방한 외국인들이 왜곡된 한국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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