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 하는 것 쌓여 힘 얻어
진료 말미에 나는 환자들에게 다음 진료 전까지 수행할 활동 과제를 내어주곤 한다. 대단한 건 아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샤워하기, 오전에 진공청소기를 돌리기, 저녁에 산책하거나 가능하면 가볍게 뛰어보는 정도다. 하지만 의욕이 떨어진 우울증 환자에겐 이마저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못할 것 같아요. 지금도 힘든데 그런 걸 어떻게 해요!”라며 저항하는 환자도 있고, 부담스럽다는 눈빛으로 “얼마나 해야 해요?”라고 되묻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러면 나는 “딱 한 번만 해보고 오세요”라고 대답한다.
우울하면 무기력해지고,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무기력하게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면 더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든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려면 기분이 행동을 결정짓게 놔둬선 안 된다. 일단 움직여야 한다. 기분은 통제할 수 없지만, 행동은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활동 과제를 얼마나 수행했는지 확인해 보면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한 환자는 거의 없다. 증상이 심할 때는 뇌의 보상 회로가 즉각적인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과제 수행이 에너지를 빼앗기는 일인 것처럼 잘못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성취도를 엑셀에 꼼꼼히 기록해 오는 강박적인 사람도 가끔 있지만,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과제란 게 있었는지 잊어버리는 이도 적지 않다.
그런데 반대로 실천이 조금씩 늘어나는 환자들도 있다. “예전 같으면 일주일 내내 집에만 있었을 텐데, 이번 주엔 아파트 주변을 한 번 걸었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보면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 이분은 곧 3할 타자가 되겠구나!’
많은 사람이 열 번 시도하면 일곱 번은 예전의 습관대로 끌려간다. 두 번은 버티다가 무너지며, 그나마 한 번 정도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수치만 보면 별것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바로 그 한 번의 경험이 삶을 바꾸는 결정적 변수가 된다.
야구에서 타율이 2할대인 선수는 흔하다. 열 번 타석에 들어서서 안타를 단 한 번 더 쳤을 뿐인데 3할 타자는 2할 타자보다 연봉도, 이름값도 훨씬 높다. 환자의 작은 실천도 이와 비슷한 차이를 만든다. 단 한 번의 실행이 치료 예후를 갈라놓는 것이다.
심리학자 존 노크로스와 마이클 램버트는 치료의 성패를 가르는 요인을 찾기 위해 수천 건의 임상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결과 특정한 상담 기법보다 더 강력한 예후 예측 인자는 환자가 반복해서 실천하는 행동의 작은 변화였다. 실패가 되풀이되더라도 계속 시도하려는 능동성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것을 ‘의미 있는 행동의 눈덩이 효과’(snowball effect of meaningful action)라고 한다. 눈덩이처럼, 아주 작은 행동이 반복되면서 강력한 힘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인간은 본래 부정적인 정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진화해 왔다. 이것을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이라고 한다. 우울감이 깊을수록 이 편향은 더욱 강화된다. 부정적 경험은 정서적으로 강하게 각인되지만 긍정적 경험은 반복되지 않으면 쉽게 소멸한다. 실패의 순간에만 머무르지 말고, 그 사이에 있었던 작은 성공을 의식적으로 떠올려보자. 야구처럼 인생에서도 3할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얼마나 완벽했냐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다시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삶을 변화시키는 진짜 힘이다.
김병수 정신건강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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