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미 육군 7사단에 6·25 참전용사 기리는 장병 복지센터 생겨

관련이슈 디지털기획

입력 : 2025-08-06 09:10:45 수정 : 2025-08-06 09:10:44
김태훈 논설위원

인쇄 메일 url 공유 - +

은성훈장 추서된 의무대원 히긴스 상병
1951년 전사 후 70여 년 만에 신원 확인

미국 서부 워싱턴주(州)의 육군 7사단 영내에 전사 후 70여년 만에 신원이 확인된 6·25 전쟁 참전용사를 기리는 건물이 생겨 눈길을 끈다. 미 7사단은 6·25 당시 한반도에서 북한군·중공군과 싸웠고, 전후에도 주한미군의 일원으로 1971년까지 한국에 주둔했다. 전쟁 때 접한 우리 민요 ‘아리랑’을 군가로 쓰는 등 한국과 인연이 무척 깊은 부대다.

지난 7월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주에 주둔한 육군 제7사단 영내에서 6·25 전쟁 참전용사 프레드릭 아서 히긴스(1931∼1951) 상병을 기리는 ‘히긴스 홀’ 건물 헌정식이 열려 7사단장 미셸 슈미트 장군(왼쪽)이 고인의 여동생을 위로하고 있다. 의무병인 히긴스는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에 붙잡혔다가 포로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미 육군 홈페이지

6일 미 육군에 따르면 지난 7월30일(현지시간) 7사단이 주둔한 워싱턴주 루이스·맥코드 기지 안에서 ‘히긴스 홀’(Higgins Hall)이란 이름이 붙은 장병 복지 센터 건물 헌정식이 열렸다. 이는 7사단 소속 6·25 참전용사 프레드릭 아서 히긴스(1931∼1951) 상병을 추모하는 것이 목적이다.

 

히긴스는 워싱턴주 브레머턴이 고향이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 뒤 7사단 방공포 부대 소속 의무병으로 한국에 왔다. 1950년 12월 그 끔찍했던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에 붙잡혀 포로가 되었고, 평안북도 창성에 중공군이 설치한 수용소로 끌려간 뒤 실종됐다.

 

전후 미군은 풀려난 포로 등의 증언을 토대로 히긴스가 수용소 수감 이듬해인 1951년 7월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다만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그의 이름은 하와이 태평양국립묘지의 실종자 명비에 새겨졌다.

2024년 9월 미국 워싱턴주 켄트 타호마 국립묘지에서 6·25 전쟁 참전용사 프레드릭 아서 히긴스(1931∼1951) 육군 상병이 의장병들에 의해 옮겨지고 있다. 히긴스는 전사 후 72년이 흐른 2003년에야 유해의 신원이 확인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SNS 캡처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은 6·25 전쟁 당시의 신원 미확인 전사자들 유해를 감식한 끝에 2023년 6월 히긴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포로 수용소에서 기아와 학대에 시달리다가 20세 젊은 나이로 목숨을 잃은 청년이 꼭 72년 만에 꿈에도 그렸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히긴스는 2024년 9월 워싱턴주 켄트에 있는 타호마 국립묘지에서 영면에 들었다.

 

히긴스 홀 헌정식에서 히긴스의 유족은 고인을 대신해 은성무공훈장(Silver Star)을 수훈했다. 이는 미 육군에서 세 번째로 훈격이 높은 훈장으로, 의무병인 히긴스가 목숨을 걸고 부상병들의 응급 조치와 이송에 최선을 다한 공로를 기리고자 추서됐다. 7사단장 미셸 슈미트 소장은 기념사에서 “히긴스 홀은 건물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의무병 히긴스 상병을 비롯해 가장 어렵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묵묵히 의료 지원 임무를 수행한 모든 분들을 위한 살아있는 기념관”이라고 말했다. 히긴스 홀에는 7사단 의무실과 군목실 등이 입주해 장병들의 신체 및 정신 건강을 보살피고 증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하츠투하츠 스텔라 ‘청순 대명사’
  • 하츠투하츠 스텔라 ‘청순 대명사’
  • 윤아 '청순 미모'
  • 최예나 '눈부신 미모'
  • 있지 유나 '반가운 손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