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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란의시읽는마음] 한밤의 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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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8-04 22:40:40 수정 : 2025-08-04 22:4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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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호

그러나 당신은 도로 위에서 길 잃은 지렁이를 맨손으로 집어 풀숲에 놓아주던 사람

죽은 새를 두 손으로 옮겨 공원 나무 아래에라도 묻어주던

 

그런 당신을 또다시 떠올리는 밤은

잔뜩 밀린 빨랫감처럼, 나는 내가 지겨워진다

 

어제 입었던 옷을 다시 걸치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는 것처럼

비릿한 추억에 코를 파묻은 채

 

(중략)

 

집 안의 창문을 죄 열고 밤공기를 불러들이며

나는 빨래집게처럼 입을 다문다

 

당신의 손가락 사이로 들려 있던 지렁이와 죽은 새와 같이

어둡고 긴 시간에 젖은 빨래처럼 걸려서

무더운 밤,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맥락을 알 수 없는 얕은 꿈들이 수차례 왔다 가기도 한다. 이런 밤에는 더러 덜 마른 옷을 입은 것처럼 찝찝해지기 마련. 비릿한 추억에 한 번쯤 코를 파묻기 마련. 스스로를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고, 그리워하고, 어둡고 긴 시간 속에 뜬눈으로 웅크려 밤이 지나길 기다린다. 여름은 여지없이 혹독한 계절.

 

시를 읽으며 새삼 깨닫는다. 지난 사랑은 참으로 질긴 것. 소량의 추억만으로 온밤을 꼬박 앓게 한다. 그러나 진짜 질긴 건 외로움 아닐까. 길 잃은 지렁이나 죽은 새를 보살피는 사람의 손길, 사람의 온기를 향해 속수무책 번져가는 외로움. 외로움을 덜지 못하는 한 젖은 사랑을 멈출 방도란 없다.

 

그립다는 말은 어쩌면 외롭다는 말. 길 잃은 지렁이와 같이, 죽은 새와 같이 끝 간 데 없이 쓸쓸하다는 말.

 

박소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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