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이 멈추면 마을이 멈춥니다.”
불이 난 29일 전남 영암군 대불일반산업단지 HD현대삼호 앞의 주민들은 화재 여파로 공장이 멈추게 될까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전력공사로부터 공급받은 고압 전력을 낮은 전압으로 바꿔주는 중앙 변전소에서 불이 나면서 조선소 전체에는 전력 공급이 중단됐다.
불이 난 전날부터 다음 달 10일까지 휴가 기간이어서 공정에 차질이 빚어진 것은 아니지만, 불에 난 설비 복구 작업에만 상당한 기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돼 협력사 직원들은 초조해했다.
출입을 막는 폴리스 라인을 사이에 두고 현장에서 서성거리던 협력사 직원 이모(30) 씨는 “화재는 진압됐지만 복구 작업이 한참 걸릴 것 같다”고 했다.

조선소 안 식당에서 조리원으로 일하는 이씨는 “그나마 휴가 기간이라서 복구만 빠르게 이뤄지면 괜찮을 것 같다”면서도 “금호타이어 광주공장처럼 복구 작업으로 출근하지 못하면 어떡하냐”고 두려워했다.
화재 현장과 왕복 2차선 거리를 두고 떨어진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또 다른 협력사 직원들도 불안한 심정을 토로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하루 20여만원의 일당을 받고 조선 업무를 담당하는 한 협력사 직원은 “HD현대삼호 조선소는 단순히 배를 만드는 곳이 아니다”며 “협력사 직원까지 1만명 넘게 이곳에서 일하는데, 지역 경제를 이끄는 핵심”이라고 말했다.
휴가 기간 고향인 경상도로 가기 위해 짐꾸러미를 들고 있던 그는 "돈을 받지 못한 직원들이 생기면 소비도 줄게 되고, 소비가 줄어들게 되면 지역 경제 자체가 기우뚱할 것"이라며 "우리 같은 일당제는 1∼2주만 일당을 받지 못해도 타격이 크다"고 말하며 택시에 올라탔다.
중앙 변전소 안 전기 설비를 태운 불이 나기 시작한 것은 전날 오후 11시 21분쯤이다. 하얀 연기가 나는 것을 목격한 직원 2명이 소방 당국에 신고했고, 자체 진화를 시도했지만 불은 이날까지 이어졌다.당시 사람이 없어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지하 공동구 안에 연기와 열기로 가득하면서 소방 당국이 진화에 애를 먹고 있다.
생산 기반 집약 시설의 화재로 가동 중단 위기에 놓인 HD현대삼호는 전남 서남권 최대 규모 사업장이자 노동자 1만3000명의 일터이다. 지역상공회의소에 따르면 HD현대삼호는 2023년 말 기준 매출액 상위 전국 1천 대 기업에 포함된 광주·전남 25개 기업에 속한 조선업체다. 이 가운데 전남에 연고를 둔 기업은 15개인데, HD현대삼호를 제외한 14개가 여수·광양 등 동부권에 몰려있다.
국내 조선업이 마주한 복합적인 위기에도 기술력을 기반한 수주 호황에 힘입어 지난해 역대 최대 매출인 7236억원의 영업이익을 내기도 했다.

이날 발생한 전남 서남권 최대 규모 사업장인 HD현대삼호의 변전소 화재는 여름휴가로 전체 조업이 중단된 상태에서 발생해 설비 유지·보수 부주의에 따른 과실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날 화재는 한국전력공사가 HD현대삼호에 공급하는 고압의 전력을 조선소 전체에 분배하는 중앙 변전소의 지하공동구 내 전선 더미가 정리된 깊이 약 1.7m의 터널 형태 공간에서 시작됐다.
통상적으로 전기·전력 계통 화재는 과부하 상태에서의 과열, 누전, 합선 등에 의해 발생한다. HD현대삼호는 전날부터 내달 8일까지 2주간 집단 여름휴가에 돌입해 화재 당일 조업이 없었다.
화재 발생을 인지하고 초기 진화를 시도했던 당직 근무자 등 목격자 전언에 따르면 설비부 폭발이나 불꽃 등 누전, 합선 등의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다.
휴가철 늦은 밤 전력 부하가 없는 상태에서 전선 더미 열 축적이 현재로서는 화재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HD현대삼호는 조업 일정이 없는 휴가철을 맞아 전날 중앙 변전소 점검을 진행했는데, 통상적인 점검 외 정확한 작업 내역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화재로 중앙 변전소가 소실되면서 HD현대삼호 전체 전력 공급은 현재 중단된 상태다. 다행히 조선소 내부에 분산된 다른 변전소는 추가 피해를 보지 않았다.

HD현대삼호는 외부에서 전력을 끌어오는 중앙 변전소만 제 기능을 되찾으면 조선소를 가동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보유 중인 비상발전기 4기 중 절반을 중앙 변전소에 투입해 비상 발전 체계를 구축할 예정이다.
통신·방송·수도 등 지하공동구 내 다른 기반시설은 정상 상태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모든 조업이 중단된 휴가 기간에 변전소와 지하공동구에서 불이 났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규명을 위해 평소 전력 계통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소방당국 관계자는 “자세한 화재 원인은 진화 작업을 마친 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합동으로 조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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