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국가 협상 전망 불투명
글로벌 공급망 다변화 움직임
새 통상환경 근본적 고찰 필요
동남아 주요국의 대미 관세 협상이 빠른 속도로 타결되고 있다. 필리핀은 7월22일, 인도네시아는 7월15일 각각 미국과의 양자 협상을 마치고 대미 수출 시 19% 관세율 적용을 확정했다. 베트남에 대해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해방의 날”(4월22일) 발표에서 제시한 46% 관세 대신, 대폭 낮춘 20%의 관세가 부과될 예정이다. 다만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일방적인 발표로, 베트남 정부는 11∼15%대로 낮추기 위한 추가 협상을 진행할 것으로 관측된다.
트럼프 행정부는 협상 상대방에게 관세 인하의 반대급부로 ‘거절할 수 없는 수준의 제안’을 강조해왔다. 이에 인도네시아는 보잉 항공기 구매와 미국산 곡물 수입 확대, 전략 광물 수출 개방 등 전방위 패키지를 준비했고, 베트남은 미국산 대형차 무관세 수입, 농산물·특정 첨단기기 수입 확대 등을 약속했다. 필리핀은 미국산 자동차 및 농산물과 의약품 일부 등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기로 했다.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관세 전략이 동남아에서는 꽤 성공을 거둔 셈이다.

‘환적 수출 방지’ 조항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미국은 인도네시아와의 협정에서 우회 수출되는 상품에는 19%가 아닌 40%의 고관세를 적용하기로 명시했다. 이는 베트남과의 합의에도 유사하게 반영되었다. 사실상 동남아를 통한 중국산 우회 수출에 대한 경고장이자 아시아 공급망을 미국의 구미에 맞게 재편하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다만 이들 3국을 제외한 나머지 동남아 국가의 협상 전망은 불투명하다. 태국과 말레이시아는 각각 36%, 24% 수준의 관세 위협을 받고 있으며 캄보디아·라오스 등은 협상력 자체가 약하다. 미국이 유일하게 흑자를 내고 있는 싱가포르 정도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다.
이런 가운데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은 지난 7월 외교장관회의에서 개별 협상 타결의 한계를 인정하고 공동 대응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미국이 양자적 접근을 취하는 이상 최소한 비슷한 수준의 관세로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회원국 간의 경쟁은 피하는 것이 최선인 상황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기업들은 어느 나라가 더 낮은 관세를 보장하느냐에 따라 생산기지 이동에 나설 것이다. 벌써 동남아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 중에서 멕시코나 인도를 대체 생산지로 검토하는 기업들이 나오고 있다. 중간재를 제공하는 한국·일본·대만도 공급망 재조정 압박을 받고 있다. 특히 미국은 환적과 원산지 기준을 엄격히 적용한다는 방침으로, 최종 생산지는 물론 그 이전 단계의 경로 설계까지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다.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 전체로 보면 ‘관세 피하기 술래잡기’가 벌어지는 셈이다.
동남아 경제의 하방 리스크도 심화되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이 7월23일 발표한 ‘2025년 아시아경제전망(ADO)’에서 동남아는 4.7%에서 4.2%로 성장률 전망치가 가장 큰 폭으로 떨어졌다. 무역 비중이 높은 동남아는 트럼프 관세 압박에 직격탄을 맞은 데다가 글로벌 무역 불안정이 대외 수요를 위축시킨 데 따라 예상할 수 있는 결과다.
한편 동남아 국가들은 증가하는 미국발 압력에 대응하는 동시에 통상 다변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아세안상품무역협정(ATIGA), 중국과의 자유무역협정(ACFTA)의 업그레이드가 완료되어 오는 10월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승인을 앞두고 있다.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의 업그레이드도 논의될 예정이다.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역시 확장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베트남·말레이시아 등 기존 회원국 외에 인도네시아는 가입 신청을 마쳤고, 태국도 참여 의사를 내비쳤다. 또 하나 주목할 흐름은 브릭스(BRICS)와의 연대다. 인도네시아는 올 초 정식 가입했고, 말레이시아와 베트남도 파트너국 자격으로 합류했다. 미국은 브릭스 참여국에 추가 관세를 예고했지만, 동남아에게 ‘다변화’는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니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임하는 것만큼이나, 이른바 “해방의 날” 이후 펼쳐질 새로운 통상환경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필요한 이유다.
최윤정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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