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미국 뉴욕에서 9·11 테러가 발생한 직후의 일이다. 당시 주(駐)유엔 한국 대표부에 근무하던 어느 외교관은 황급히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찾아갔다. 그해 9월21일 유엔 총회 참석을 위해 뉴욕을 방문하는 김대중(DJ) 대통령이 묵을 장소였다. 9·11 테러로 유엔 총회가 무기한 연기되고 DJ의 방미도 취소되며 호텔 측에 미리 지급한 숙박비 예약금을 돌려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흣날 펴낸 자전적 에세이에서 이 외교관은 “평소 지나가는 사람들과 어깨가 부딪히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을 만큼 인파로 붐비던 호텔 로비가 텅 빈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19세기 말 문을 연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은 2017년 개·보수를 위해 문을 닫기 전까지 100년 넘게 뉴욕을 찾는 국제적 명사들의 단골 숙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에 들어선 유엔 본부와 가깝다는 이점 덕분에 유엔을 찾는 세계 각국 정상과 고위 외교관들이 앞다퉈 이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DJ는 물론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노무현, 박근혜 전 대통령도 뉴욕 방문 때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투숙했다. 1991년 9월 한국이 북한과 더불어 유엔에 가입하며 161번째 회원국이 된 뒤 우방국들의 유엔 주재 대사를 위한 감사 오찬이 열린 곳도 바로 이 호텔이다.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한국을 구한 더글러스 맥아더 미 육군 원수는 생애 말년을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스위트룸에서 보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현역 군인 신분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오른 박정희 장군(훗날 대통령)이 같은 해 11월 뉴욕을 방문했다. 그가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맥아더 원수와 만난 것은 적어도 국내 언론에서는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당시 81세 고령이던 맥아더 원수는 “6·25 전쟁 당시 나의 전우였던 박 장군과 만나 참으로 기쁘다”며 “한국이 통일을 이룩하는 것을 볼 때까지 살고 싶다”고 말했다.

2017년 이후 8년간의 개·보수 공사를 거의 다 마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이 오는 9월부터 다시 문을 연다. 원래 미국인 소유였던 이 호텔은 2014년 중국 안방보험그룹에 의해 인수됐다. 이후 안방보험 자산이 중국 국영 다자보험으로 이관되며 현재는 다자보험의 계열사에 해당한다. 그 때문인지 미국 등 서방 국가 정상들은 ‘보안’을 이유로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이용을 꺼리는 분위기다. 리모델링으로 호텔 내부야 더 좋아졌겠으나, 그 사이 중국에 대한 경계심 또한 눈덩이처럼 커졌다. ‘뉴욕을 찾는 세계 정상들의 왕궁’이란 옛 명성을 되찾기는 영영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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