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급결제·현금 인출 등 실생활서 쓰여
가상화폐 담보·알고리즘 기반도 가능해
민간기업이 화폐 발행권 확보 큰 변화
결제·송금 수수료와 시간 절감 등 강점
블록체인상에서 자유롭게 거래도 가능
안정성·신뢰 훼손 땐 대규모 이탈 불가피
발행 주체 많아지면 관리·감독 어려워
규제 회피 악용·통화주권 훼손 우려도

1코인=1달러, 1코인=1000원식으로 법정화폐와 가치가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 전 세계 금융시장에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현재 투자용 자산에 머물러 있는 암호화폐와 달리 지급결제, 현금 인출 등 실생활에 쓰이며 법정화폐를 대체할 수 있는 데다 중앙은행 고유 권한이었던 화폐 발행권을 민간 기업들에게 주는 것과 다름없어 엄청난 변화가 예상된다. 각국 중앙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이 가져올 변화와 부작용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정부의 강력한 지지 속에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되고 있다. 가 보지 않은 길이지만 혁명은 이미 시작됐다.
◆왜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나
스테이블코인은 가격 변동이 극심한 가상화폐와 달리 원화, 달러 같은 법정화폐 등에 일대일로 가치를 고정시킨 안정적인 암호화폐다. 법정화폐뿐 아니라 가상화폐 담보, 알고리즘 기반도 있다. 2022년 일주일 만에 450억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한 테라-루나가 알고리즘 기반 스테이블코인이었다. 이 때문에 스테이블코인을 법제화한 나라들은 알고리즘 기반을 금지하고 발행량에 상응하는 준비금을 일대일로 예치하도록 하고 있다. 고객이 현금으로 인출하고 싶을 때 곧바로 지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지난달 미 상원에서 통과된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는 준비금으로 현금(달러)과 미 단기 국채 등 안전자산만 인정한다. 즉, 발행사는 스테이블코인 발행량 만큼 미 국채를 사서 은행에 예치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정부가 스테이블코인 활성화를 강력 추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미 국채 최대 수요국인 중국과 일본이 비중을 줄이는 등 ‘셀 아메리카’(Sell Amaerica·미국 자산을 팔고 떠나는 것) 현상이 두드러지며 미 국채 금리가 급등했다. 막대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국채를 팔아야 하는 미국 입장에선 큰 부담이다. 중국이 포함된 브릭스(BRICs)의 중앙은행들이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 활성화를 추진하고, 중동 국가들이 석유 결제 통화를 달러 아닌 다른 통화로 대체하고 있는 것도 미국의 달러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스테이블코인이 미 국채의 새로운 수요처이자 기축통화로서 달러 패권을 공공히 해주는 구원투수로 부상한 것이다.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2019년 24억달러에서 지난 5월 말 기준 2300억달러(주요 10종)로 폭증했다. 이 가운데 달러 기반 테더(USTD)와 미국에 상장된 유일한 스테이블코인 회사인 서클이 발행하는 USDC의 시가총액이 각각 1531억달러, 610억달러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또 스테이블코인의 준비자산 81.5%(1728억달러)가 미 국채다. 지니어스 법안이 발효되면 미 국채 수요가 2028년까지 2조달러에 달할 것으로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추산했다.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민간업체들은 중앙은행이 독점해온 시뇨리지(화폐 주조차익)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스테이블코인 발행량만큼 준비금으로 미 국채를 사면 연 4% 안팎의 국채 수익률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1조달러 규모의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면 발행사는 400억달러의 시뇨리지를 챙길 수 있다.

현재 스테이블코인의 80% 이상이 가상자산 시장에서 거래되며 ‘디지털 화폐’로 자리 잡았다. 가격변동이 큰 가상화폐와 달리 가격이 고정돼 있어 거래소 간 이동뿐 아니라 결제, 송금, 리스크 헤지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법정화폐와 달리 정부의 감시나 규제를 받지 않고 블록체인상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다.
결제·송금 수수료와 시간을 절감할 수 있다는 것도 큰 강점이다. 기존 지급·결제 시장에선 사업자와 소비자 사이에 신용카드사, 전자지급결제대행(PG), 부가가치통신망(VAN) 사업자 등을 거치며 수수료가 발생한다. 해외송금을 할 때도 국내은행에서 해외은행으로 송금하기까지 4∼5개 기관을 거치며 3∼5일이 소요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송금수수료 없이 단 몇 초만에 보낼 수 있다.

◆신뢰 떨어지면 ‘코인런’, 금융리스크로 확산
스테이블코인이 장밋빛 미래만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가깝게는 2023년 서클의 USDC 디페깅(De-pegging·스테이블코인 가치가 연동 자산가치와 괴리되는 현상) 사례가 있다.
서클이 준비자산의 8%를 예치해 놓은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하자 USDC의 개당 가격은 0.88달러까지 추락했다. 무디스에 따르면 2023년 1∼11월 중 테더, USDC 등 주요 법정화폐 담보 스테이블코인의 디페깅은 600번 이상 발생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의 가치 안정성 및 준비자산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거나 기술 오류 및 관련 범죄 등이 나타날 경우 디페깅 및 대규모 상환 요구가 발생해 ‘코인런’(대규모 인출 사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주체가 많아지면 관리·감독이 어려워지고, 자본 규제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달 발간한 연례 보고서에서 스테이클코인의 위험성을 19세기 미국 자유은행 시대 유통됐던 사설 은행권과 비교했다. 1837년 은행에 자체 은행권 발행을 허용하자 시중에 엄청난 규모의 돈이 풀리고 화폐 사기와 뱅크런이 만연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도 지난 10일 “자본금이 10억원인 회사와 은행이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의 가치가 같다고 하기 어렵다. 화폐마다 가치가 달라질 것”이라며 “그러면 19세기 (미국에서 은행들이) 민간 화폐를 발행해 많은 혼선이 있었고 통화정책을 하기도 굉장히 어려웠는데 그 과정을 겪게 된다”고 우려했다.
민간업체들은 스테이블코인을 많이 발행할수록 시뇨리지를 많이 남길 수 있는 구조여서 소비자들에게 혜택을 제공한다는 명분으로 경쟁적으로 발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스테이블코인이 자본의 해외 유출을 가속화할 수도 있다. 해외 결제·송금이 활발해지면 결국 달러 스테이블코인 사용량이 급증하며 미국이 세계 각국의 화폐 통화량·유동성을 흡수하고, 이는 다른 나라의 통화주권 침해로 이어진다는 우려가 나온다. 통화주권을 지키기 위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자는 것인데, 오히려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의 환전을 가속화하고 자본 유출입 관리가 어려워지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또 블록체인 네트워크 특성 상 거래내역은 공개되지만 거래 주체의 신원이 특정되지 않는 ‘가명성’ 때문에 스테이블코인이 가상자산 지갑에 들어가는 순간 금융당국의 실명거래 감시는 쉽지 않다. 자금 세탁과 상속세·증여세 등 각종 세금 회피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스테이블코인이 급속히 확산하면 중앙은행의 통제 범위 밖의 통화가 늘어나 통화정책의 효과가 떨어질 수도 있다. 서울대 김영식 교수(경제학부)는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활성화될 경우 지급준비금에서 은행 예금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면서 통화량 추계의 정확성이 떨어지고, 통화 관리가 어려워짐에 따라 금리 중심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저하될 수 있다”며 “또한 은행 대출을 통한 금융중개기능이 축소돼 실물부문의 투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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