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팔균 사망 소식에 아내마저 자결 비운
1924년 7월 2일 중국 만주의 홍경현 이도구에서 대한통의부 독립군들이 사령관의 지휘 아래 야외 훈련을 하는 가운데 정체불명의 중국 마적 300여 명에게 습격을 받았다. 이때 사령관 신팔균(申八均)이 향년 42세로 운명하였다. 이들 마적의 배후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지만 일각에서는 이들 마적이 일제에게 매수된 군벌 장쭤린(張作霖) 부대에 훗날 편입되었음에 주목하고 있다.
1882년 5월 19일 한성부 서부 황화방 소정동계(오늘날 서울 정동)에서 출생한 신팔균은 부친과 조부가 각각 석희(奭熙), 헌(櫶)이다. 조부 신헌은 전통적인 무반의 후예이면서도 추사 김정희의 제자답게 문물과 시무(時務)에 밝았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아 서양식 병기를 연구하였는가 하면 1876년 일본의 전권변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와 협상을 벌여 병자수호조규를 체결하였다. 당시 무력으로 압박하는 일본의 포함(砲艦) 외교에 굴하지 않고 근대 국제법과 관례들을 연구해 가며 조선 정부의 자주적 입장을 가능한 한 관철시키려 노력하였다. 이어서 1882년에는 미국과의 협상에도 대표로 임명되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신팔균도 이러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근대 문물을 겸비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1900년 오늘날 육군사관학교에 해당하는 육군무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고 2년 뒤 졸업함과 동시에 육군 참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여러 보직을 거쳐 평안북도에 소재한 강계 진위대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1907년 일제 통감부의 강압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그는 전통 무반 집안의 후예로서 고뇌의 세월을 감내해야 했다. 그는 곧바로 일제에게 무력으로 저항하기보다는 교육구국활동에 진력하였다. 또한 안희제·이원식·윤세복·서상일·김동삼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국권수호운동에 주력했다. 이후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무장독립운동을 염두에 두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기 역사적 경험이 결코 사라지지 않고 항일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때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겪었고 활용하였던 신식 군사훈련과 전술 교범을 학생들에게 전수하였다. 신팔균의 호가 ‘동천’(東天)이었는데 교관이었던 지청천(池靑天), 김경천(金擎天)과 함께 ‘남만주 삼천’(南滿洲 三天)으로 불릴 정도였다. 훗날 신흥무관학교 출신 2000여명이 청산리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결코 밀리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일담에 따르면 신팔균의 전사 소식은 가족들에게 즉시 알려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만삭인 부인 임수명(任壽命)이 받을 충격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지인들의 강권으로 국내에 귀국했다. 그리고 4개월 뒤 남편의 죽음을 알자, 11월 2일 유복녀와 함께 음독 자결하였다. 향년 30세였다. 간호사이자 독립운동가로서 운명을 같이 했던 평생 동지의 죽음이었다. 당시 아무개 일간지는 임수명이 자결 직전에 사직동 332번지 셋방 한 칸을 얻어서 굶으며 근근이 연명하다가 남편 사망 소식을 접한 데다가 세 살배기 둘째 아들이 병으로 사망하자 희망을 잃고 자결하였음을 보도하였다. 그 뒤 신팔균의 유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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