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7년 5월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이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진보 성향의 정의당에 ‘러브콜’을 보냈다. 문 대통령이 여성 헬기 조종사 출신인 피우진 예비역 육군 중령을 국가보훈부 장관으로 발탁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정의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보신당 소속으로 정치 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 이에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는 “이보다 더 짜릿하고 감동적인 인사가 없다”며 “역대급 홈런”이라는 호평을 내놓았다. 당시만 해도 민주당은 소수 여당으로 혼자서는 국회 과반 의석 확보가 어려웠던 만큼 비록 소수당(6석)이지만 정의당의 협조가 절실했다.
민주당과 정의당의 이 같은 관계는 이른바 ‘정의당 데스노트’가 탄생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문재인정부 시절 청와대가 지명한 중앙 부처 장관 등 고위 공직 후보자를 상대로 정의당이 ‘퇴짜’를 놓으면 낙마로 이어진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실제로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 조대엽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 조동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 등이 정의당 데스노트에 이름을 올린 뒤 지명 철회를 당하거나 스스로 사퇴했다. 이쯤 되면 정의당이 민주당과 더불어 연립여당의 구성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정의당의 도덕적 우월성을 상징하는 것이나 다름없던 데스노트의 위력은 2019년 한풀 꺾였다. 자녀의 대학 및 대학원 입시 비리에 연루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을 때 정의당은 그를 데스노트에 올리지 않았다. 조 수석의 장관 임명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며 ‘조국 사태’라는 말까지 생겨났는데도 정의당은 정부·여당에 협조하는 길을 택했다. 결국 그는 법무장관이 되었지만 얼마 뒤 스스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정의당 심상정 대표는 “(조 장관을 대하는 정의당의 태도가) 국민적 기대에 못 미쳤던 것은 사실”이라고 사과했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며 단독으로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한 뒤로 정의당 데스노트는 잊힌 단어가 되었다.
지난달 4일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이 1개월여 만인 11일에야 조각(造閣)을 마쳤다. 이진숙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후보자,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를 비롯한 다수가 이런저런 의혹에 휘말린 가운데 과연 국무위원으로 적격인지 의문이 든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국회 과반 다수당임을 강조하며 “단 한 명의 낙마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니 이래서야 국회와 언론에 의한 검증이 왜 필요하겠는가. 2024년 22대 총선을 거치며 정의당은 원외 정당으로 전락했고 그 공백을 메운 조국혁신당은 민주당의 우당(友黨) 역할에만 충실하기로 작정한 듯하다. 온갖 흠결에도 불구하고 거대 여당만 믿고 버티는 장관 후보자들을 보며 정의당 데스노트가 그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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