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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내 이름은 소중한 기록의 잠금장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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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7-10 22:55:56 수정 : 2025-07-10 22: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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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뜬 사람의 노트북 비밀번호
친구의 이름임을 알았을 때 전율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나는 비밀번호 어떻게 할지 고민

우리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에겐 관대하다. 그 사람과 애틋했던 기억만 남기고 추억하려는 속성이 있다. 함께 공유하지 않은 과거의 시간까지도 소중해진다. 그래서 자신보다 연장자였거나, 혹은 어린 시절에는 서로 모르던 사이여서, 직접 볼 수 없었던 그 사람의 어린 시절 사진을 뒤늦게 보게 되면 생소함과 순수함, 그리고 그리움까지 합쳐져서 묘한 감정의 소용돌이에까지 휘감기게 된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이라는 책에서 어머니가 떠난 후, 어머니가 다섯 살 때 겨울 정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특별한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어머니라는 본질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그 사진을 보고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낀 것이다. 바르트는 이처럼 사진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칼날처럼 뚫는 부분에 관심을 가졌다.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공통된 느낌과 상반되게 이렇듯 개인적인 충격과 자극을 주는 여운의 감정을 ‘푼크툼’이라고 말하는데, 어머니를 잃었다는 상실감과 동시에 어머니가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천수호 시인

내게도 충분히 공감되는 얘기다. 나도 어머니와 공동으로 시집을 낸 적 있다. 어머니의 수많은 노트에서 일부 시를 발췌해 수록하고 그 글에 대해 내가 화답하는 형식의 메아리 시집이었다. 그 시집의 날개에 어머니 사진도 붙였다. 군복을 입은 아버지 곁에 나지막이 앉은 새각시 적의 어머니 사진만 잘라내 실은 것이다. 어머니가 떠나고 난 후, 나는 우연히 그 시집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얌전하게 쪽 찐 머리에 자그마한 얼굴과 조용히 내려다보는 눈매, 그리고 꽃무늬 저고리까지, 거칠고 대찬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가녀린 어머니의 모습이, 바르트가 어머니의 다섯 살 사진에서 체험한 것 같은 푼크툼을 느낀 것이다. 생전에는 무심코 지나친 사진이었는데, 갑자기 찌르는 듯한 충격이 왔다. 그 깊은 여운 감정은 달리 표현할 길 없이 묘하고 아팠다. 원래 어머니는 드세거나 강한 모습이 아닌 순정한 여성이었던 것에 새삼 마음이 아려온 것이다.

사진이 아니어도 떠난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는 순간을 맞닥뜨릴 때가 있다. 사진가 박태희씨는 친구인 고(故) 조현예씨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글에 자신의 사진을 엮어서 ‘사막의 꽃’이라는 책을 냈다. 조현예씨가 미국에서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노트북은 비밀번호로 잠겨 있었고 박태희씨는 그 노트북을 건네받았다. 박태희씨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며 노트북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현예씨는 자신의 소중한 기록에 무엇으로 잠금장치를 했을까. 박태희씨는 극도로 긴장하며 천천히 비밀번호 칸을 메우기 시작했다. “박·태·희…” 그녀는 바로 자신의 이름을 천천히 새겨 넣고는 엔터키를 눌렀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트북이 열렸다.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라는 존재가 친구의 열쇠 구멍에 꼭 맞는 열쇠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감동을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 있을까. 박태희 작가가 친구를 잃은 지 8년이나 지난 후에도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조현예씨에게 분명 박태희 작가는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을 열 수도 있는 소중한 비밀번호였던 것이다. “꽃도 같은 꽃이 아니다/사람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사막의 꽃’ 조현예 152쪽 인용)

천재 시인이라 기대하던 차도하 시인은 참 재미있는 시를 남기고 떠났다. “천국은 외국이다. 어쨌든 모국은 아니다. 모국은 우리나라도 한국도 아니다. 천국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입국할 때 모든 엄마를 버려야 한다. 모국을. 모국어를.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법을. 맘-마음-맘마를.”(차도하 시인의 ‘입국심사’ 부분 인용) 이곳을 버려야 천국을 얻는단다. 그렇다면 이곳에 남은 자만이 추억을 붙들고, 또 떠난 자의 사진을 움켜쥐고 있는 건가. 그나저나 또 하나의 깜찍한 고민이 생기지 않았는가. 나는 노트북의 비밀번호를 무엇으로 남겨둘 것인가. 아무도 서럽지 않게, 아주 섭섭하지도 않게.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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