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기/ 황정은/ 창비/ 1만4000원
역사가 일상에 스며드는 순간, 우리는 어떤 문장으로 살아남는가. ‘작은 일기’는 12·3 비상계엄부터 150일 동안 격랑을 지나며 소설가 황정은이 광장과 집안, 거리와 책상 앞을 오간 기록을 써내려간 에세이다.

“계엄이래.”
원고 집필을 마치고 책을 읽으며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하던 시간, 동거인의 목소리가 느닷없는 계엄령 발표 소식을 전했다. 이후 거리로 쏟아진 사람들의 분노와 외침 속에서 작가의 일기는 시작된다.
도저히 쓰기와 읽기에 집중할 수 없던 날들. “매국과 내란의 얼굴들”이 떠오르며 “랩이 터진 것처럼 욕”이 쏟아졌다. 고립된 농민들의 연대 요청을 듣고 남태령에 모여 밤을 지새운 사람들을 보며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 경이로워 하다가도, 서울 서부지방법원 습격 사태를 보고 “사회 상식의 수준이 무너져가는 걸 지켜보는 고통에 시달렸던” 얼마 전 기록이 단단한 문체로 담겼다.
작가의 일기는 악(惡)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악함은 약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권력을 쥔 자들의 악함도 약함에서 기인한 것일까. 작가는 악에 골몰하거나 침잠하는 대신 추운 광장으로 나가 이웃들의 얼굴을 보고 손을 맞잡으며 어두운 시간을 견디는 편을 택한다. 그리하여 일기는 함께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애정을 되새기는 길로 나아간다. 지난 4월 어느 일기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으로 마무리된다. “냉소가 되는가. 지난 넉 달 동안 길에서, 집회 현장에서, 동네에서 마주친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생각한다. 냉소가 되나.”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百의 그림자’ ‘디디의 우산’ ‘연년세세’의 황 작가는 글쓰기에 엄격하고 문장을 아껴 쓰는 작가다. 좀처럼 에세이를 쓰지 않는 그가 4년 전 첫 에세이 ‘일기’(창비)를 펴낸 건 ‘사건’으로 회자됐을 정도. 그런 그가, 우리가 종종 절망하고 요동했던 시간에 대해 동시대인으로 쓴 문장들을 공개했으니. 그의 소설을 아끼고 오래 곁에 두었던 독자라면, 이보다 더 큰 위안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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