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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의 시처럼 느껴졌던 시나리오 …시간을 다르게 향유하는 경험 선사”

입력 : 2025-07-08 19:39:31 수정 : 2025-07-08 19:39:30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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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밤’ 주연 한예리·김설진

알코올 중독자·중증 류머티즘 환자
서로를 고치려 들지 않고 끌어안아
죽음 앞두고 둘만의 방식으로 사랑

“상대에게 신뢰받아 서로 믿으며 작업
봄밤은 멜로… 힘든 영화라 짐작 말길”

알코올 중독인 여자 영경(한예리)과 중증 류머티즘을 앓는 남자 수환(김설진)은 천천히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둘은 상대를 바꾸려 하는 대신 함께 앓자는 심정으로 서로를 끌어안으며 사랑한다. 세상에는 이런 모양의 사랑도 존재한다. 소설가 권여선의 동명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강미자 감독의 영화 ‘봄밤’(9일 개봉) 이야기다.

영경과 수환이 함께하는 밤은 분명 ‘밤’이지만 ‘봄밤’이기도 하다. 밤이라 어둡지만 하얗게 핀 봄꽃이 빛을 발한다. 여러 불행이 쌓인 ‘밤’을 지나는 영경은 자주 취하고 종종 목놓아 울지만 수환과의 관계 속에서는 ‘봄’을 산다. 제주의 강풍 속에서 촬영한 영화의 공기는 차갑지만 마냥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

강미자 감독의 영화 ‘봄밤’(9일 개봉)은 알코올과 병으로 죽음과 마주한 ‘영경’과 ‘수환’의 사랑을 절제된 미학으로 그렸다. 시네마 달 제공

영화 전반에 흐르는 쇠락의 정조를 만들어낸 건 두 주연배우의 힘이다. 한예리(40)와 김설진(43)은 의상·분장팀이 없는 저예산 영화에 신체라는 표현 도구 하나를 가지고 뛰어들었다. ‘죽음을 직면한 중년 남녀의 사랑’이라는 간명한 줄거리 요약으론 그 감동을 제대로 전할 수 없는 영화를 완성한 두 사람을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친한 친구나 남매처럼 자연스러운 대화를 주고받았다. 200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한예리)과 무용원(김설진) 동기로 만났으니, 어느덧 22년을 넘긴 인연이다. 한예리는 김설진을 “많은 걸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다 이해하는 사람”, 김설진은 한예리를 “앞으로도 오랜 시간 향유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영경役 한예리

‘봄밤’의 시작은 한예리였다. 강 감독의 첫 장편 ‘푸른 강은 흘러라’(2008)에서 주연을 맡았던 그는 강 감독이 16년 만의 신작 시나리오를 건네자 출연하기로 했다. 수환 역으로 물망에 오른 배우가 없던 상황에서 한예리는 김설진을 떠올렸다. 그는 “몸무게를 감량하고 신체를 혹독하게 몰아붙여 아파 보이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사람, 온몸으로 수환을 연기할 에너지를 가진 배우로 그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말했다.

김설진은 “평소 좋아하는 동료와 호흡을 맞추게 돼 감사했다”며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이게 과연 어떻게 영화로 구현될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이 시나리오 자체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졌다. 반복되는 장면이 많아 처음에는 인쇄 오류인가 생각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수환役 김설진

실제 ‘봄밤’은 서사를 내세우는 전통적 극영화라기보다 암막과 반복의 이미지를 통해 시처럼 구성됐다. 극 중 취한 영경이 반복해 읊는 김수영의 시 ‘봄밤’처럼, 영화는 감각과 리듬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강 감독이 이야기를 덜어내고 덜어내 함축적인 영화를 만들었듯, 두 배우는 수분기 없이 메마른 육체로 카메라 앞에 섰다. 한예리는 5㎏, 김설진은 8∼10㎏을 감량해 생명이 꺼져가는 인물을 표현했다.

강 감독을 포함해 스태프 6명이 전부였던 초미니 촬영 현장. 배우들은 약 3개월 동안 직접 현장에서 부딪히며 연기했다. 한예리는 “시나리오상 동선이 정해져 있지 않아 현장에서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찾아가며 결정했고, 의상도 매번 감독님과 상의해 제 옷을 입었다”고 설명했다.

무대 위 잔뼈가 굵은 안무가이자 무용가, 예술감독이지만 장편 영화는 처음인 김설진에게 부담은 없었을까. 그는 “앞장서 끌어가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카메라 앞에서) 영경과 어떻게 함께 존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훨씬 컸기 때문에 다른 부담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두 배우가 ‘같이 있음’에 집중한 흔적은 영화 곳곳에서 엿보인다. 영경과 수환은 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함께 요양원에 들어가지만 만남과 헤어짐은 반복된다. 외출증을 끊어 요양원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영경의 중독 증상 탓이다. 배우자인 수환이 영경을 제지하기는커녕 영경의 의사를 존중하므로 의사도 이를 막지 못한다.

어느 날 취해 돌아오는 영경이 비틀거리다 쓰러지자 수환은 휠체어에서 내려 기어가 그를 향해 다가간다. 늘 그래왔듯, 그를 업기 위해 등을 내주지만, 병이 깊어진 탓에 영경과 함께 고꾸라진다. 눈을 감은 영경은 그런 수환을 안고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처럼 두 배우의 육체가 만나 빚는 화학작용에 대해 묻자 두 사람은 “상대에게서 무한한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나 또한 신뢰하며 작업할 수 있었다”고 서로 공을 돌렸다. 한예리는 “영경을 바라보는 수환의 시선과 몸짓, 섬세한 터치를 보며 영경이 충만하게 사랑받는 인물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우리가 멜로영화를 찍고 있다는 감각을 분명히 느꼈다”고 했다.

수환은 영경의 취약한 면을 고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그와 함께 시간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김설진은 ‘봄밤’을 통해 관객이 시간을 다르게 향유하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는 소망을 밝혔다. “‘봄밤’을 찍으며 ‘나는 과연 타인을 그 자체로 사랑하고 있는가’를 되묻게 됐어요. 누군가를 옳고 그름의 잣대로 판단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감각을 관객들도 한 번쯤 느껴보시기를 바랍니다.”

영화 전반에는 비감이 흐르지만, 그것이 곧 슬픔에 잠긴다는 뜻은 아니다. 카메라가 포착한 두 사람의 사랑의 순간들 덕분이다. 한예리는 “너무 힘들고 아픈 영화일 거라 짐작하고 부담을 느끼시지 않으시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봄밤’은 멜로 영화예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구나, 하고 편하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규희 기자 lk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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