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으로 썼던 소설 보여주자 각본 제의
“‘괴물’ 같은 작품을 만들어 보는 게 목표”
학원물이지만 일진·폭력 아닌 선거가 소재
욕망·악의적 비방 등 현실 정치판과 빼닮아
“소규모 사회서 1인자 권력놀음·몰락 그려내”
봉준호 감독의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옥자’의 연출부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봉 감독에게 2014년 습작으로 썼던 소설을 보여줬다. 그 소설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러닝메이트’로 탈바꿈해 한진원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 됐다. 봉 감독과 함께 영화 ‘기생충’의 각본을 공동 집필했던 한 감독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오스카상)에서 각본상을 안은 지 5년 만이다.

지난달 24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한 감독에게 ‘러닝메이트’로 홀로서기를 이뤄낸 소감을 묻자 그는 “거장(봉준호)의 울타리를 벗어난 첫 도전인 만큼, 관객의 높은 기대치에 대한 부담이 컸다”고 말했다.
‘러닝메이트’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학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학원물이지만, 일진이나 학교 폭력을 다룬 액션 장르가 아닌 정치 드라마다. 불의의 사건으로 전교생의 놀림감이 된 주인공이 학생회장 선거 부회장 후보로 나서 온갖 권모술수를 헤쳐 나가는 스토리가 담겼다. 한 감독은 “10대들이 보고 싶은 학원물을 만들고 싶었다”며 “선거나 정치를 다룬 작품들은 누아르, 스릴러 장르가 많은데 선거 유세 자체를 스포츠 대항전처럼 표현했다”며 “그런 면에서 ‘러닝메이트’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학생들의 선거지만, 현실 정치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상대 후보에 대한 악의적 비방이 오가고, 오랜 친구를 배신하는 등 대중 앞의 모습과 전혀 다른 숨겨진 욕망이 드러나기도 한다. 2년 전에 촬영을 마치고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지만, 마침 올해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서 유세 장면이 주목을 끌기도 했다. 기호 1번은 푸른색, 기호 2번은 붉은색 띠를 하고 선거운동을 하는 장면에서도 뒷말이 나왔다. 한 감독은 “선거 시즌을 겨냥해서 만든 작품이 아니었다”며 “조기 대선은 예상한 일이 아니라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조기 대선으로 인해 선거, 투표에 관심을 갖는 나이 폭이 훨씬 넓어졌다는 것을 느꼈다. 약간 기대도 하고 걱정도 했다”고 털어놨다.

현실 정치보다는 드라마 ‘미생’이나 소설 ‘우리들의 영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한 감독의 설명이다. 그는 “‘우리들의 영웅’에서는 사소한 곳에서 긴장과 갈등, 화해 등 온갖 분위기가 나온다”며 “소규모 사회 안에서 1인자의 권력 놀음과 몰락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소개했다. ‘러닝메이트’의 학생회장 후보인 곽상현(이정식)은 소설 ‘우리들의 영웅’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던 엄석대의 모습을 떠올려 만들었다고 한다.
배우 윤현수, 이정식, 홍화연, 최우성 등 젊은 신인들의 감각적인 연기도 눈길을 끈다. 한 감독은 “스타 캐스팅은 향후 비중이나 뻔히 보이는 예측 가능한 부분이 있는데 상대적으로 젊은 배우들과 함께하다 보니 그런 예측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며 “촬영 현장에서도 비슷한 연배의 배우들이 학교와 동아리 같은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각본을 쓰는 작가에서 연출가로 변신한 것은 그의 큰 스승인 봉 감독의 역할이 컸다. 한 감독은 “계속 다음 작품이 있는 감독이 되고 싶다”며 “제작사들이 동의만 한다면 직접 쓴 작품을 더 연출해보고 싶다”고 밝혔다. 봉 감독의 ‘괴물’ 같은 작품을 만들어 보는 게 꿈이란다.
한 감독이 연출을 하기까지 봉 감독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봉 감독에게 일부러 조언을 구하진 않았다는 한 감독은 “중간에 인사 드리는 것 말고 작품 관련해서는 어떤 것도 물어보지 않았다”며 “봉 감독님 어깨 너머로 배울 것은 다 배웠고, 그늘에서 벗어나 달걀이 아니라 메추리알이라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한 감독은 봉 감독에 대해 “가장 정공법으로 승부하는 가장 성실한 분”이라며 “봉 감독님을 흉내 내려고 콘티도 제가 최대한 그리고 배우와 스태프 이름도 외우려 했다. 감독님 같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감독님처럼 작품을 대하고 싶다”고 했다.
봉 감독도 제자를 향해 애정이 듬뿍 담긴 메시지를 남겼다. 봉 감독은 ‘러닝메이트’ 공개 직후 “지극히 영악한데 의외로 해맑은 사랑스러운 고교생들의 캐릭터 드라마”라며 “정치와 선거의 한복판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풋풋하고 싱그럽다. 그들 모두의 앙상블을 버무려낸 한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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