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플된 ‘K컬처 성지’… 日 MZ ‘북적’
신오쿠보 골목마다 한글 간판 빼곡
“드라마 보고 韓 인식 크게 변화”
쌈밥집 등 한식당엔 긴 대기줄
60만 재일 한인 25만명으로 줄었지만
한류 힘입어 ‘코리아타운’ 상권 호황
한국어학원엔 일본인 수강생 900명
“K팝 한국말로 부르고 싶어서 공부”
과거사 문제로 외교 갈등 땐 혐한 기승
日국민 韓 호감도 26%∼63% ‘널뛰기’
2024년 한·일 왕래 규모 1200만명 넘어
“다양한 분야 교류로 정치 부침 극복을”

“K팝을 제대로 된 한국말로 불러보고 싶어져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K팝 공연장에 가면 한국 팬들하고도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고 너무 좋아요.”
한·일 수교 60주년을 나흘 앞둔 지난 18일 일본 도쿄 다카다노바바역 인근 서울아카데미. 한국 유학 준비생을 포함해 약 900명의 일본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곳이다. 이날 저녁 7시50분쯤 학원을 찾자 직장 일 등을 마친 수강생들이 수준별로 짝을 이뤄 강의를 듣고 있었다.
초급반 수업은 ‘드디어’라는 표현을 익히는 것으로 시작됐다. 강사가 “주로 문장 앞에 붙어 ‘드디어 BTS 멤버들이 모두 군대에서 제대했다’, 이럴 때 쓰는 것”이라고 설명하자 수강생들이 BTS 팬인 모토하시 미키씨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수강생들은 한글 문장을 돌아가면서 읽고 일본어로 해석했다.

학원에서 만난 수강생 7명에게 한국어를 배우게 된 계기를 물었다. 15년 이상 수업을 받고 있는 후지모토 지카케, 오치아이 미야코씨는 공통적으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꼽았다. 후지모토씨는 “월드컵 이후 드라마 ‘겨울연가’가 방송되면서 한국어 붐이 일었다”며 “욘사마 배용준, 한·일 합작 드라마 ‘프렌즈’의 원빈 같은 배우들이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 인식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국어로 술술 말했다.
초·중급반에선 BTS, 2PM, 빅뱅, 샤이니 등 K팝 가수들과 ‘커피프린스 1호점’, ‘발리에서 생긴 일’ 등 한국 드라마가 주로 언급됐다. 한국어를 배운 지 2년쯤 됐다는 20대 여성은 최근 아스트로 공연을 보러 인천에 다녀왔다고 했다.

학원에서 신주쿠역 방향으로 15분쯤 걸어가면 ‘한류 성지’로 불리는 신오쿠보 코리아타운이 나온다. ‘고향’, ‘한잔’, ‘분식’, ‘포장마차’ 같은 정겨운 단어가 한글로 적힌 간판이 즐비한 곳이다. 음식점·주점 말고도 화장품 가게, 미용실, 한국 식재료를 파는 상점 등이 있다.
일본 최대 유흥가인 신주쿠 가부키초에서 일하는 한인 등을 상대로 김치나 한국 음식을 파는 가게가 1990년대부터 하나둘 생기더니 지금은 골목 구석구석까지 한국 상점이 들어서 있다. 일본 정착 30년째인 김재욱 서울아카데미 대표는 “최근에는 어학연수나 유학 등을 왔다가 인근에 자리 잡고 장사를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도쿄총영사관 등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현해탄을 건너온 1세대 한인과 그 후손은 광복 후에도 약 60만명이 일본에 남았다. 하지만 이들이 대부분인 특별영주자는 1992년 58만5170명에서 2023년 25만3879명으로 줄었다. 윗세대는 사망 등으로 자연 감소하고 아랫세대는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경우가 늘어나서다. 수교 후 일본에 정착한 이른바 뉴커머(일반영주자) 수가 최근 증가하고는 있지만 전체 재일 한인 규모는 작아지는 추세다.
그럼에도 신오쿠보 한국 점포는 점점 늘어 현재는 700곳 이상으로 추산된다. 현지인과 외국 관광객이 이곳 상권을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낮 12시쯤, 신오쿠보 거리에서 들려오는 말은 대부분 일본어였다. 유모차를 끌고 나와 설렁탕 정식을 먹으며 대화하는 일본인 부부, 인도 난간에 기댄 채 회오리감자나 핫도그 등을 먹는 교복 차림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2층에 있는 한 쌈밥집은 1층까지 대기줄이 늘어서 있었다.
부침이 없진 않았다. 10년 전 수교 50주년 당시 국내 언론은 ‘흔들리는 한류 거리’를 언급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해 일왕에게 식민 지배 사죄 요구를 한 2012년을 기점으로 빈발한 혐한 시위가 가라앉지 않았던 때였다. 홍경진 재일대한민국민단 사무부총장은 통화에서 “우익들이 한인 상점 문을 발로 차면서 들어와 거친 말을 내뱉고, 일본인 손님이 보이면 ‘매국노’라고 비난하곤 했다”며 “한마디로 한국 사람들은 장사를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일본 내각부가 매년 실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를 보면 양국 간 정치·외교적 갈등은 한국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 대한 친근감’은 2011년 62.2%까지 치솟았다가 이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한 2012년 39.2%로 뚝 떨어졌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 아베 신조 일본 내각이 문재인정부에 강하게 반발했던 2019년에는 20%대로 내려앉았다.
식민 지배와 전쟁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협정문에 못 박지 못한 채 배·보상 문제도 피해 변제 성격의 청구권 협상으로 덮어버린 ‘미완의 국교 정상화’가 여전히 양국 관계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양국 간 왕래가 1200만명을 넘는 등 교류 증가로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점점 넓어지는 것은 긍정적인 대목이다. 한 외교 당국자는 “한·일 국민이 다양한 분야의 교류·협력을 통해 더욱 끈끈해지면 정치적 부침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나타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다음달 7일 도쿄 공연이 일찌감치 매진되는 등 한류의 범위도 확대되는 모습이다. 지난 17일 도쿄 산토리홀에서 열린 수교 60주년 음악회 예술감독을 맡은 첼리스트 양성원 연세대 음대 교수는 “코로나19 때를 빼면 1993년부터 매해 공연 등으로 일본을 찾았다”며 “정치·외교적 트러블이 존재하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한층 더 깊이 들어가면 서로에 대한 호감과 존경심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한국 변리사·변호사들과의 협업이 많아 3년 전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는 변리사 아시하라씨는 “어려서부터 한국인을 접할 기회가 많은 도쿄와 그렇지 않은 지방 간에도 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지방에 사는 부모님은 한국인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겨울연가’를 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더니 인식이 달라졌다. 문화가 사람의 감정을 변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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