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에는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어린 나이에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는 주인공 나영이 이민 이유를 묻는 친구에게 말한다. “노벨문학상을 타야 하니까.”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 위해선 한국을 떠나야 한다는 말은 오랫동안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었다. 이후 나영은 연극으로 진로를 정하면서 토니상을 꿈꾸지만, 그 꿈 역시 ‘해외에 있어야 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이런 생각은 점점 낡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최근에 한국에서 출발한 이야기, 한국 창작자의 손에서 만들어진 공연이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르고 토니상을 휩쓸었다. 한강의 문학이 세계를 울린 데 이어 ‘어쩌면 해피엔딩’은 한국 창작 뮤지컬로는 처음으로 토니상 6관왕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현지시간으로 6월8일,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은 뮤지컬 작품상, 극본상, 음악상, 연출상, 남우주연상, 무대디자인상 등 주요 부문을 휩쓸며 무려 6관왕에 올랐다. 연극·뮤지컬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토니상에서 올해 시상식 최다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도 함께였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이 작품이 한국에서 처음 기획되고 초연된 창작 뮤지컬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에서 완성된 창작물이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토니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극본과 작사를 맡은 박천휴 작가는 한국인 최초로 토니상을 받은 창작자로 이름을 올렸다. 과거에는 ‘패스트 라이브즈’ 속 나영처럼 세계 무대에 오르기 위해 한국을 떠나는 것이 전제였지만, 지금은 한국이라는 토양에서 자란 서사가 그 자체로 세계의 중심에서 울림을 만들어낸다. 이제 더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품을 쓰기 위해 이민을 가야만 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예술적 기반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는 결국 한 사회가 예술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려 있다. 상상력과 서사에 투자하는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하고, 어떤 작품을 그저 ‘해외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 먼저 존중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이 필요하다. 점점 더 다양성을 요구하고 있는 세계에서 한 자리를 한국이 당당히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제 우리의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한국에서 세계를 향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제 우리는 어떤 세계를 만들어갈 것인가’다.
이지영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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