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생산에 재고 누적
주행거리 0㎞ 신차 → 중고차로 등록
실제 가격보다 10% 이상 싸게 판매
실적 부풀리고 보조금도 수혜 ‘꼼수’
당국, 경영진 소환 “시장 왜곡” 경고
수출 공세도 거센 역풍
가성비 무기… 동남아·중남미 공략
현지화로 관세 우회·공급과잉 해결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반발 자극해
美, 사실상 봉쇄… EU도 “고율 관세”

최근 중국 자동차 플랫폼에서 ‘제로㎞’라는 문구를 달고 판매되는 차량들이 소비자의 시선을 끌고 있다. 신차처럼 생산돼 주행거리는 0㎞지만 서류상 ‘중고차’로 등록돼 신차 가격보다 10% 이상 저렴하게 팔리는 차량들이다. 소비자는 가격 혜택을 본다고 여길 수 있지만, 품질 보증 기간이 짧아지고 향후 잔존가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이 같은 판매 방식이 시장 질서를 교란하고 산업의 장기적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규제에 나섰다.
◆제로㎞ 중고차, 구조적 과잉의 상징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 10일 사설을 통해 “제로㎞ 중고차는 실질적으로 신차와 다를 바 없지만, 중고차로 둔갑시켜 파는 것은 소비자의 권익을 침해하고 시장의 공정성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앞서 지난달 중국 상무부는 비야디(BYD), 둥펑자동차, 중고차 플랫폼 등과 긴급회의를 열고 해당 문제에 대한 단속 방안을 논의했다. 차량 등록 이력 추적, 재등록 이후 일정 기간 재판매 금지, 품질 보증 조건 재정비 등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현지에서는 이 같은 판매 관행이 단순한 ‘꼼수’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제로㎞ 중고차는 딜러가 판매 물량을 채우기 위해 차량을 한 차례 등록한 후 다시 되팔아 실적을 부풀리는 수단으로 악용되며 이는 보조금 수혜 기준을 충족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판매량 통계가 왜곡되면서 시장의 실제 수요를 판단하기 어려워지고, 기업의 재고 전략과 정부의 산업 정책에도 왜곡이 생긴다.
제로㎞ 중고차는 중국 자동차 산업이 직면한 어려움을 드러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의 자동차 생산 능력은 약 4870만대였지만 가동률은 59%에 그쳤다. 특히 전기차 부문은 정부 보조금과 지방정부의 산업 육성책에 힘입어 급속도로 확장됐으나 내수 수요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재고가 누적되고 있다. 중국자동차공업협회(CAAM)는 2024년 상반기 기준 전기차 재고가 전년 동기 대비 60% 이상 증가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중국의 주요 전기차 업체들은 올해 들어 출혈 경쟁을 벌이고 있다. BYD는 일부 모델의 가격을 34% 가까이 인하했으며, 샤오펑, 니오 등 후발주자들도 할인 프로모션을 지속하고 있다. 일부 업체는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차량을 판매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웨이젠쥔 장성자동차(GWM) 회장은 공개 발언을 통해 “제로㎞ 중고차는 업계 전체가 내부 경쟁의 악순환에 빠진 결과물”이라며 “중국 전기차 산업은 지나치게 가격 중심의 경쟁에 치우쳐 있으며, 이대로 가면 생존 가능한 기업이 얼마 남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출혈 경쟁의 후유증
중국 전기차 업계의 과잉생산과 가격 경쟁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2023년 중국의 전기차 생산량은 1289만대로 전년 대비 34%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내수 판매 증가율은 22%에 그쳤다. 과잉생산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중국은 차량이 소비자에게 인도되지 않더라도 딜러에 출고만 되면 판매로 잡히는 구조다. 이 때문에 실제 수요보다 과도하게 생산하고 출고량을 부풀리는 방식이 고착돼 왔다. 결과적으로 소비자가 타지 않은 차량들이 제로㎞ 중고차로 재유통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출시 3개월 이내 주행거리 50㎞ 이하 차량이 중국 중고차 시장에서 약 13%, 1960만대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왜곡된 경쟁은 업계 전반의 체력 고갈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 최대 인터넷 기업 바이두와 지리자동차의 합작사인 지웨자동차는 한때 ‘테슬라 대항마’로 주목받았지만 지난해 11월 이후 생산과 판매를 중단했고, 스타트업 다수는 자금난으로 이미 시장에서 퇴출됐다. 업계 1위 BYD마저 위기에 직면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BYD의 미지급 어음 등 운전자본 적자 규모는 1254억위안(약 24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정부는 최근 주요 전기차 업체 경영진들을 베이징으로 소환해 가격 경쟁 자제를 당부하고, 과도한 할인 정책을 자율 규제로 제한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구조적 과잉 문제를 해소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조치도 근본적 해결이 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재고 물량을 해외에서도 다 소화하지 못하면 결국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은 소수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급 과잉, 세계로 번지다
이 같은 중국 전기차의 공급 과잉은 중국을 넘어 세계 시장에서도 파장을 낳고 있다. 중국 전기차는 저렴한 가격과 빠른 생산 속도를 바탕으로 유럽, 동남아, 남미 등지로 급속히 수출되고 있다. 특히 BYD는 헝가리, 태국, 브라질 등지에 현지 공장을 세우며 유럽연합(EU)과 미국의 관세 장벽을 우회하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중국의 전기차 수출 전략은 자국 내 과잉생산 문제를 해외 시장으로 분산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전략은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반발을 자극하고 있다. 미국은 올해 들어 중국산 전기차에 100% 고율 관세를 부과하며 수입을 사실상 봉쇄했다. 캐나다도 비슷한 수준의 조치를 검토 중이다. EU는 2023년부터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수혜 여부를 조사해왔고, 이달 초 BYD(17.4%), 지리자동차(19.9%), 상하이자동차(38.1%) 등 주요 기업에 차등적으로 반보조금 관세를 예고했다. 브라질은 2024년부터 단계적으로 35% 관세를 부과하며, 튀르키예는 40%의 추가 관세 또는 7000달러(약 966만원) 고정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중국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중국 상무부는 EU의 조치에 대해 “명백한 무역 보호주의이며, 세계 공급망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비판했다. 일부 중국 매체는 미국의 관세를 ‘신냉전식 전기차 봉쇄’로 규정하며, 희토류 수출 제한, 보복 관세 등의 맞대응을 거론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계 시장의 경계는 갈수록 강화되는 분위기다.
이처럼 중국 전기차의 수출 공세는 역풍을 맞고 있다.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삼은 전략이 각국의 보호무역주의를 자극한 결과다. 중국 정부는 수출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주요 시장인 북미·유럽의 봉쇄는 타격이 크다. 더구나 내수 부문도 신뢰 회복이 쉽지 않다. 제로㎞ 중고차 논란은 중국 소비자들 사이에서도 회의적인 시선을 낳고 있다. 한 베이징 시민은 “가격은 싸지만 보증이 짧고 중고차로 등록된 차량을 과연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중국자동차공업협회 관계자는 로이터통신에 “정부가 등록 시스템, 판매 이력 투명성, 소비자 보호 기준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은 긍정적 신호”라면서도 “그러나 시장 자체가 회복되지 않으면 또 다른 변칙 판매 방식이 등장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일부 지방정부는 과잉생산 문제 해소를 위해 전기차 기업의 신규 공장 설립에 제동을 걸고 있다. 저장성, 산둥성, 안후이성 등에서는 생산능력 심사 기준을 강화하고 기존 재고 수준에 따라 산업보조금 지급을 차등 적용하고 있다. 이는 2010년대 후반 신재생에너지 업계에서 벌어졌던 보조금 거품 붕괴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으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한국 전기차 업계에도 시사점이 있다. 현재 중국의 저가 전기차가 본격적으로 한국 시장으로 직접 유입되지는 않고 있지만 동남아와 중남미 시장에서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한국자동차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산 전기차는 부품 단가와 조립 효율성 측면에서 압도적 경쟁력을 갖고 있다”며 “한국 업체는 품질 프리미엄과 AS 인프라를 무기로 차별화 전략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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