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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핵시설 타격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핵보유국이 됐나 [뉴스+]

, 이슈팀

입력 : 2025-06-17 05:00:00 수정 : 2025-06-16 21: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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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케네디 이스라엘 핵 반대했지만 암살당하며 비핵화 동력 상실
미국, 핵 공식 인정 않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중동 핵 확산 막아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을 표적 공격하면서 양측 충돌이 격화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래 10년 주기로 이웃 중동국가들과 전쟁을 벌였다. 건국 직후에는 아랍 5개국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지만 이후로는 이스라엘도 주변 국가를 수차례 침공 또는 선제 공격을 가했다.

 

15일(현지 시간) 이스라엘 텔아비브 상공에서 이스라엘 방공 시스템 아이언 돔이 이란의 미사일을 요격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화약고’인 중동에서 현재 유일하게 핵을 보유한 나라는 이스라엘이다. 중동의 맹주 이란이 국제 사회의 제재에도 핵개발을 감행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의 핵 보유와 무관치 않다.

 

이스라엘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이 인정한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중국이 아니지만, 별다른 제재 없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고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 이스라엘 핵개발의 구세주 

 

5개 나라만 핵보유를 인정해준 분기점은 1970년 발효된 NPT 출범이었다. 그 전에 핵개발에 성공한 나라는 인정해주되, 새롭게 핵을 개발하거나 보유국이 비보유국에 이전해주는 건 금지하는 조치였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직후부터 핵 개발을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싼 아랍국가들 사이에서 생존하려면 비대칭 전력 확보가 필수적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이에 도움을 준 나라는 프랑스였다. 1950년대 프랑스 국가 지도부에는 반(反)나치 저항운동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유대인과 이스라엘에 동정적이었다.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프랑스는 이스라엘 기술자들의 자국 핵시설 파견을 허락하고, 핵개발 작업에 참여시켰다.

 

15일(현지시간) 이스라엘 중부 바트얌의 한 건물이 이란이 발사한 미사일 공격으로 파괴돼 있다. 신화연합뉴스

1956년 이스라엘은 남부 네게브 사막의 디모나 지역에 극비리로 원자로 건설에 착수했다. 미국 유대계 부자들도 자금을 댔다. 1년 뒤 미국의 U-2 정찰기가 이스라엘 네게브 사막에서 건설 중인 수상한 시설의 사진을 찍었다. 미국은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용 원자로와 똑같은 시설이라고 봤지만, 당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60년 2월13일 프랑스령 알제리 사하라 사막 지하에서 진행된 프랑스 최초의 핵실험은 성공적이었다. 이로서 프랑스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핵무장국이 됐다고 핵전문가들은 말한다. 두 나라가 기술을 공유하면서다. 이스라엘이 핵실험 없이 사실상 핵폭탄을 갖게 된 것은 1966년으로 추정된다.

 

◆美 사실상 방조 하에 핵무기 보유 성공

 

이스라엘의 핵개발에 강경한 입장을 보인 이는 1960년 당선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는 핵 시설이 섬유공장 단지라고 우긴 벤구리온 이스라엘 총리를 향해 핵 사찰을 받으라고 압박했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1963년 11월22일 케네디가 어이 없이 공식 행사 현장에서 암살당하며 케네디의 중동 핵심 과제였던 이스라엘 비핵화 정책도 동력을 잃었다.

 

후임인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4년 1월 디모나 사찰을 시행했지만, 현장에 파견된 미국 기술자들은 이스라엘의 위장술에 속아 “디모나 시설은 핵무기를 만들 능력이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유대계 인사들로부터 많은 정치자금을 받은 존슨 대통령이 사실상 이스라엘의 핵개발에 눈감은 것이란 평가도 있다.

 

이스라엘 핵 시설 위성 사진. Planet Labs 캡처

1968년 미 CIA는 ‘이스라엘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봐야 한다’고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백악관은 이스라엘이 어차피 핵개발에 성공한 마당에 괜히 사찰을 감행했다가 중동 지역의 핵 개발 시도가 확산될 것을 우려했다. 존슨 대통령은 1969년 퇴임을 앞두고 이스라일에 대한 사찰 계획을 전면 중단했다.

 

1969년 취임한 리차드 존슨 대통령 시절, 이스라엘 핵개발이 중동 국가 사이에서 논란이 되자 소련은 이들에게 ‘핵기술을 전수해주겠다’며 환심을 샀다.

 

외교적으로 이스라엘 문제를 그냥 두고 덮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닉슨 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유대인 출신 헨리 키신저는 이스라엘의 핵보유 사실을 불투명하게 하는 외교 정책을 추진하자고 대통령을 설득했다. 이스라엘에 핵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하고 이스라엘도 인정하지 않는 ‘전략적 모호성’을 통해 중동의 핵 확산을 막는 명분을 만든 것이다.

 

미국의 애매한 입장은 1960년대 말 대만의 장제스 총통, 1970년대 초 한국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시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미국의 묵인 하에 제재 없이 핵개발에 성공한 나라는 이스라엘뿐이었다.

 

반면 국제사회의 온갖 제재와 비난을 감수하고 핵무기를 개발한 나라도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북한이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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